등록 : 2014.01.01 20:39
수정 : 2014.01.02 11:21
[매거진 esc] 시계태엽 패션
눈도 이제 제법 자주 오고, 좀더 꽁꽁 싸매지 않으면 집 밖으로 나갈 엄두도 안 나는 계절의 한중간에 와 있다. 고향과는 다른 서울의 매서운 추위에 매년 깜짝깜짝 놀란다. 최대한 맨살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중에서도 귀를 덮는 비니는 가장 손쉽고도 활동하기 불편하지 않은 아이템이라 좋다. 그래서 매년 비니만 몇개씩 사들인다. 고루한 취향이 잘 안 바뀌어 매번 비슷한 것을 고르기 일쑤이지만, 옷을 쇼핑할 때보다는 부담이 덜 가는데다가 사실 따지고 보면 다 각각에 개성이 담겼다고 매번 합리화한다.
사진의 비니가 가장 최근에 산 것이다. 나이절 케이본이라는 영국 브랜드의 것인데, 60대 할아버지인 나이절 케이본이 40년이 넘는 노하우를 바탕으로 과거의 군복이나 빈티지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옷을 만든다. 이러한 브랜드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이 오센틱(authentic: 진짜의, 진짜와 똑같게 만든) 라인이다. 이 중에는 1920~50년대 아웃도어웨어에서 영감을 받아 에베레스트에 오른 영국의 등반가 조지 맬러리의 이름을 딴 재킷도 있고 에베레스트 파카, 카메라맨 재킷 등 브랜드의 상징적인 제품들이 있다. 내가 산 것 또한 오센틱 라인이며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피셔맨 비니, 즉 ‘어부의 비니’라는 이름이 붙은 이 모자는 2차 세계대전에 영국 해군이 썼던 모자에서 유래하는데, 그냥 쓸 수도 있고 밑을 접어 스컬 캡(skull cap: 머리에 꼭 맞는 작고 둥근 모자. 주로 성직자들이 쓴다) 스타일로 연출할 수도 있다. 니트의 조직은 로 게이지(1인치 안에 짜여 있는 바늘의 수)에 속하는 5게이지라서 더 두텁고 따뜻하다.
비교적 머리 위쪽이 남는 부분 없이 머리에 꼭 맞는 이 니트 모자의 또다른 이름은 ‘워치 캡’(watch cap)이다. 미국 해군이 승선할 때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쓴 것에서 유래했다. 이 패션을 시각적으로 가장 잘 나타낸 장면은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에 있다. 영화에서 해양학자 역을 맡은 빌 머리는 영화 내내 주황색 워치 캡을 쓰고 나온다. 같이 승선한 팀원들도 같은 유니폼과 모자로 한층 단결된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왜 하필 주황색 모자인지에 대해서도 풀어낼 이야기가 있다. 주황색은 가시성을 높이기 위한 색 중 하나인데, 항공점퍼와 같은 군복의 안감에도 많이 쓰였다. 조난을 당했을 때 뒤집어 입으면 하늘에서도 눈에 잘 띌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구명조끼나 구명튜브도 주황색인 이유가 있다.
내 경우 모자를 고를 땐 색은 예나 지금이나 무난한 것을 고르고 모양은 위에서 언급한 워치 캡 스타일을 선호한다. 옛날에 한창 비니와 보잉 선글라스의 조합이 유행한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처럼 얇은 니트 조직에 머리 위로 길쭉한 비니는 절대 고르지 않는다. 서태지가 유행시킨 비니가 연상되는 검고 길쭉한 것도, 너무 커서 두 겹으로 뒤통수에서 접히는 방울이 달리거나 베레모 스타일도 고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구구절절 까다로운 이유로 모자를 고른다 해도 누구에게는 영화 <나 홀로 집에>의 도둑1이 쓴, 머리에 딱 맞는 비니가 떠오를 수 있으니 취향의 우위 문제는 이쯤에서 접어두는 것이 좋겠다.
남현지 디어매거진 편집장. 사진 남현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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