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1 20:53
수정 : 2014.01.02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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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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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수상한 북극
요즘 내가 살고 있는 영국 남부는 오후 3시 반이면 해가 진다. 해 떠 있는 시간이 하루에 8시간이 안 된다. 이런 음울한 환경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면서 살기 위해서는 대단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아침에 해가 안 떠도 눈을 뜨고, 낮에 해가 져도 집에 가면 안 된다. 북위 51도의 영국이 이 지경인데, 북극점 코앞의 스발바르 같은 곳은 이미 11월부터 밤만 계속되고 있다. 북극 다산기지 연구원들은 정말 의지의 한국인들이시다.
밤만 계속되는 극야(Polar night)는 모르지만, 낮만 계속되는 백야는 더러 겪어봤다. 내 북극권 여행은 언제나 회사가 휴가를 보내주는 여름에 갔기 때문에, 낮은 삽으로 퍼내고도 남을 만큼 길었다. 하지 무렵 갔던 스발바르나 알래스카에서는 아예 24시간 내내 해가 지지 않았다. 이게, 해가 지지 않는다고 해서 밤새 햇살이 쨍쨍한 게 아니다. 해가 지려다 말고 산꼭대기에 멈췄다가, 생각에 잠긴 듯 그 자세 그대로 밤새 걸려 있다. 그래서 오후 4시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딘가 불길해 보이는 햇빛이 밤새 구름 사이로 들다 말다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알 수 없이 마음이 불안해진다. 백야의 빛에 보이는 풍경들이라는 게 현실성이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커튼을 걷으면 순록이 동네 강아지처럼 전봇대 앞을 어정거리거나, 밖이 환한데도 동네 아이들 한명 나와 놀지 않는다. 피리 부는 아저씨가 다 데려갔나.
북위 60도의 알래스카 포인트호프에서의 새벽 4시. 창문에 눈 던지는 거짓말 같은 소리가 있었으니, 에스키모가 되고 싶어 흘러들어왔다는 일본인 둘이었다. 해도 떠 있는데 집에서 뭐 하냐는 두 사람을 따라 동네 마실을 돌았다. 문 열린 집에 들어가 차도 얻어 마시고, 동네 청소년이 한방에 모여 놀고 있는 집을 찾아갔다 쫓겨나기도 했다. 사람들은 잘 생각 같은 건 없어 보였다. 백야에는 밤새 놀고 잠은 해 안 뜨는 겨울에 몰아서 자나? 우리를 쫓아낸 에스키모 소녀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침 7시에 들어가 그때부터 자면 되지. 낮에 자나 밤에 자나 똑같잖아.”
동네 구석구석 겨우내 내린 눈이 아직도 녹지 않고 쌓여 있었다. 집 앞마당에는 까만 고래수염이 구멍 난 타이어처럼 쌓여 있고, 지붕에는 정체 모를 짐승의 고기와 가죽이 말라가는 북극의 백야. 아, 그 집 현관에 걸려 있던 동물은 안다. 한장의 가죽이 되어 조용히 말라가고 있는 북극곰이다. 고래가 그려진 동네 구멍가게는 문을 닫았고, 벽에 세워진 농구대는 바람에 흔들거렸다. 바닷가에서는 녹기 시작한 해빙들이 조금씩 틈을 벌리기 시작했다. 이 틈으로 조만간 북극 고래들이 힘차게 숨을 뿜으며 올라올 것이다. 나는 언제나 백야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빛이라고 생각해 왔다. 여기 이 북극 귀퉁이의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작 불안해야 할 것은 우리였다. 몇 시간 뒤 우리는 지나가던 동네 아줌마 앞에서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다. “아니, 바닷가에 총도 없이 그냥 가면 어떻게 해? 북극곰한테 잡혀 죽으려고 작정했어? 아니 웃어? 이것들 봐라,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최명애 <북극 여행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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