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8 19:41
수정 : 2014.01.09 09:48
[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이미 얼굴로 일을 보고 있었다. 낯빛이 똥색이다. 그 절박한 색을 보고도 점원은 매정하게 손님용 화장실은 없다 딱 자른다. 몇 백 미터는 족히 떨어진 백화점으로 가보란다.
지난달 23일, 크리스마스 선물 준비를 마지막까지 깔고 앉았던 최후의 독일인들이 벼락치기 수험생의 고통을 안고 거리로 뛰쳐나온 날이다. 내일이면 가족들이 어서 빨리 네가 가족인 걸 선물로라도 증명해보라 도열해 있을 테니 속도 탈 게다. 바짝 신경질난 장을 달래가며 인파를 뚫고 한 발짝씩 나가려니 앞이 노래졌다.
눈앞에 마의 성처럼 크리스마스 장터가 서 있었다. 본 시내 광장에 한 칸짜리씩 통나무 가건물이 쪼르르 선 이 장터도 이날이 올해 마지막이다. 한 달 장사의 대목, 총력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터 길목마다 뜨겁게 끓인 글뤼바인과 노란색 계란주를 들이켜는 사람들로 꽉꽉 막혔다. 잔을 돌려줘야 보증금 2유로를 받으니 마실 사람 마신 사람 뒤엉켜 기다리는 김에 차라리 통성명을 하고 말 형국이다. 그 와중에 사과잼을 발라 먹는 독일식 감자전이며 생선튀김까지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그 시간까지 아무것도 못 고른 결정 장애 손님들은 선물 좀비가 돼 몰려다녔다. 장터 가설 어린이용 관람차는 마지막 코 묻은 돈을 털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가열차게 돌아갔다. 엊그제 지역방송 기자가 제 손으로 소매치기를 해보이며 좀도둑이 창궐하니 가방을 앞으로 껴안고 다녀라 경고했던 곳이다. 늘어선 통나무 가건물이 족히 50개는 넘는데 환장하게 화장실은 없었다.
경보 선수 걸음으로 겨우 백화점에 도착하니 여기도 건물이 터져나가게 생겼다. 그 자리에서 ‘정말, 차라리, 확!’ 이런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용케 장에 아부해 가며 한국 백화점에서처럼 2층으로 향했다. 없다. 콧등도 안 보인다. 계산대 직원 붙들고 물으니 올라가란다. 3층, 없다. 등에선 숨 쉴 때마다 땀이 펌프질됐다. 아무나 붙들었더니 또 올라가란다. 4층, 없다. ‘야! 문명 좋아하시네. 야만이다 야만.’ 딱히 누구랄 거 없이 맘속으로 삿대질해댔다. 5층 꼭대기 층에 달랑 하나, 그 앞엔 줄이 거인의 대장처럼 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돈 안 내면 눈치 주니까 25센트짜리를 챙겼다. 화장실 청소원만 평화유지군처럼 앉아 동전을 지켰고 줄 선 이들은 모두 새치기하면 네 두 다리에 바로 오줌발을 갈겨 주마 하는 결의로 타오르는 듯 보였다.
|
김소민 독일 유학생
|
그 하얀 변기 품에 안기니, 행복이 별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의 그 야박한 공중화장실 인심, 서러운 기억들도 몰려왔다. 본 지하철역엔 아예 화장실 따윈 없다. 기차역 화장실은 동전을 투입하지 않으면 들어가지도 못하게 돼 있다. 친구 토마스는 백화점 옷가게 탈의실에서 새 옷 입어보려다 뭔가 발밑이 질퍽해 기겁했다고 했다. 누군가 되게 급했던 거다. 뇌보다 민감한 장을 지닌 독일인 마르크는 서울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게 지하철 3호선 학여울역 화장실이었다며 그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선물이고 뭐고 집으로 후퇴하니 텔레비전에선 크리스마스 스트레스 다스리는 법이 한창이다. 가족들 모이니 갈등도 익어가는 계절인가 보다. 심리학자는 크리스마스엔 무조건 평화로워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라, 필수 방문 리스트 따위는 찢어버려라 조언했다. 새해엔 부디 공중 임시화장실을, 장엔 평화를.
사진 김소민 제공
광고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