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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18일 충북 충주시 수안보온천의 한 가족탕에서 장덕형·이미화씨 부부(강원 원주시 태장2동)가 두 아이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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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돌아온 가족 온천탕 인기
일제강점기 도입돼 성행하다 쇠락해가던 가족 온천탕이 다시 뜨고 있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젊은 부부들이 좋아한다.
대욕장보다 안전하고 가족끼리 오붓하게 즐길 수 있어 추운 겨울 몸을 녹일 수 있는 가족여행지로 선택한다.
“대실 예약 안 하셨죠? 계산 먼저 하고 4시간 뒤에 오세요.” 지난 1월17일 오전, 부산시 동래온천지구의 한 숙박업소. ‘대실’ 하면 먼저 떠오르는 ‘러브모텔’ ‘불륜’ 따위 단어가 무색하게, 매표소 앞 복도를 메우고 기다리는 이들은,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그야말로 남녀노소들이다. 갓난아기, 유치원생·초등생을 동반하거나 노부모를 모시고 온 부부가 대부분이고, 어르신 부부와 젊은 남녀 짝들도 섞여 있다. 아이들은 수영장에 온 듯이 비닐튜브를 들고 들뜬 모습이고, 부모는 장난감·간식거리·옷가지를 담은 큼직한 가방을 들었다. 이들이 줄 서서 방이 비워지길 기다리는 건 ‘가족탕 객실’이다.
“아이들 때도 밀어주고,
침대서 쉬며 간식도 먹는 맛에
한달에 한번꼴 가족탕 찾는다”
동래온천, 수안보온천 쪽에 많아
최근 ‘가족탕 온천욕’이 어린 자녀를 둔 젊은 부부들 사이에 인기를 끌면서 ‘쇠락’과 ‘최첨단’으로 양극화를 달리는 우리 온천 문화와 형식의 새 풍속도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뜨거운 온천물에 온몸 푹 담그고 쉬어보고 싶어지는 겨울 한복판. 쇠락해 가다 다시 뜨고 있는 유명 온천지구의 가족탕들과, 낡고 허름한 옛날 방식을 고집하며 더 인기를 누리고 있는, 비좁고 오래된 대중온천탕의 욕실 안쪽을 들여다보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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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동래온천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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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아빠들 줄 서서 차례 기다리는 가족탕
가족탕이 뭘까? 한마디로 큼직한 욕조가 딸린 객실을 갖춘 숙박업소를 말한다. 일제강점기 들어온 일본식 온천여관에서 비롯한 형식이다. 유명 온천지역의 대형 숙박업소엔 작은 대중탕 욕조를 떠올리게 하는, 타일이 붙은 욕조를 갖춘 가족실이 한두개씩은 딸려 있었다. 온천욕의 대중화와 각종 편의시설·놀이시설을 갖춘 대형 온천탕이 선보이면서 ‘가족탕’은 일부 노부부들이나 찾는 옛 온천 문화의 하나로, 점차 사라져가던 추세였다. 이런 추세를 뒤집고 있는 이들이 젊은 부부들이다.
인터넷에서 ‘가족탕’ 검색을 해보면, 다양한 이용 후기들과 함께 ‘어린아이를 둔 부부인데 시설 괜찮은 가족탕 있는 온천을 추천해 달라’는 내용이 줄을 잇는다. 이들이 찾는 가족탕은 ‘반드시 온천수를 쓰는 곳이어야 하고, 욕조는 큼직하고 깨끗하면서 가격은 저렴한’ 곳이다. 매주 가족탕을 찾아 물 좋은 온천을 순례한다는 이들도 눈에 띈다. 계모임 아주머니들이나 어르신들이 애용하던 가족탕 형식의 온천탕을 어린 자녀를 둔 부부들이 찾는 건 왜일까?
“온천욕을 하고는 싶은데, 아이들이 어려서요. 넓고 시설 좋다는 대중온천탕에 가봤자 애들 돌보느라 지치고 안전에도 신경쓰느라 정신이 쏙 빠져요. 또 남녀가 구분돼 부부와 아이들이 서로 떨어져 몸을 씻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가족탕이 딱이에요.”
동래온천의 한 가족탕 전문업소에서 만난, 8살·5살 자녀를 데리고 온 30대 김아무개씨 부부(부산 대신동)는 “가족이 오붓하게 뜨거운 탕에 함께 들어앉아 있으면 쌓였던 피로가 쫘악 풀리는 느낌”이라며 “아이들 때도 밀어주고, 침대에서 쉬며 간식도 먹는 맛에 한달에 한번꼴로 가족탕을 찾는다”고 말했다. 부부나 가족끼리의 온천욕이 편하고 즐거운 건 젊은 부부나 어르신 부부나 매한가지다. 부산 해운대온천 거리의 한 가족탕 업소 매표소에서 만난 70대 부부의 말씀. “아주 좋아요. 대중탕하고는 천지 차이지. 뜨거운 온천수 맘대로 받아놓고 들어앉아 서로 때도 밀어주고, 얘기도 나누고. 얼마나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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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시 온양온천의 낡고 허름한 대중온천탕 신정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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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유명 온천지역의 가족탕 전문업소도 늘어나는 추세다. 경남 창녕 부곡온천의 경우 한두곳뿐이던 가족탕 업소가 최근 2~3년 새 4~5곳으로 늘었다. 창녕군청 생태관광과 온천담당 이진규 계장은 “어린 자녀를 둔 가족 단위 방문객이 가족탕을 선호하면서, 온천지역의 기존 숙박업소들이 대형 욕조를 들인 가족탕 전문업소로 리모델링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유명 온천 지역에 새로 선보이는 가족탕 업소들은 월풀 욕조에 편백나무 욕조 등으로 시설을 고급화하는 추세다.
활발하게 가족탕이 운영되는 온천지역으로는 부산 동래온천과 충북 충주 수안보온천이 꼽힌다. 물 좋기로 소문난 동래온천 지역엔 시설이 낡은 소규모 가족탕까지 포함해 10여곳의 가족탕 전문업소가 운영중이다. 일부 업소는 예약하지 않으면 객실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수안보 온천지구에도 대중탕과 가족탕을 갖춘 모텔·호텔이 5~6곳 있다. 10년 전부터 운영해 온 한두곳을 제외하곤 최근 몇년 새 내부 개조 등을 통해 선보인 대형 업소들이다. 해운대온천 지역에도 시설이 낡은 소규모 업소를 포함해 5곳 정도의 가족탕 업소가 있다. 창원 마금산온천, 담양온천, 아산 온양온천, 화성 월문온천, 청도온천 등지에도 가족탕 운영 업소들이 있다.
이들 업소의 가족탕 운영 방식은 대실 전용과 숙박 겸용 두 가지로 나뉜다. 모텔식 객실을 갖춘 숙박 겸용 업소와 달리, 대실 전용 업소들은 대형 욕실에 침대 없는 작은 공간만 딸려 있는 형태로, 숙박객은 받지 않고 24시간 대실만 해준다. 대개는 대실과 숙박을 겸하는 형태다. 숙박 겸용 업소들은 보통 아침부터 저녁까지 2~3시간 단위로 대실 고객을 받고, 밤엔 숙박 고객만 받는다. 수질 좋고 시설 좋은 곳은 대실이건 숙박이건 하루 이틀 전에 예약하고 입금을 완료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있다. 숙박객에게 대중탕 무료 이용권을 주는 곳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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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관 탈의실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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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탕 이용 가격은, 허름한 여관식에서부터 호화 호텔의 특실급까지 시설과 규모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어린 자녀를 둔 젊은 부부들이 자주 찾는 곳들의 경우 2~3시간 대실에 2만~4만원대가 많다. 대개 성인 2인 기준 금액으로, 어린이 추가 비용은 별도로 받는다. 숙박엔 2만~3만원이 더 붙는다. 고객이 많은 업소는 청결에도 신경을 쓴다. 동래온천의 한 인기 가족탕을 몇시간 지켜보니, 대실 고객이 빠져나가자 즉시 아주머니 3명이 달려들어 욕실 전체를 비누거품으로 씻어내는 모습이었다.
지난 18일 5살·3살 자녀를 데리고 충주 수안보 온천지구의 한 대실 전용 가족탕을 찾은 장덕형(36)·이미화(34)씨 부부(강원도 원주시 태장2동)는 “처음 가족탕에 와보는데, 욕실이 생각보다 넓고 깨끗해서 마음에 든다”고 했다. 아내 이씨는 “무엇보다 좋은 건 대중온천탕처럼 부부가 아이를 하나씩 맡아 따로 온천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업소에서 10년째 관리 일을 한다는 서아무개씨는 “옛날엔 계모임이나 노인 부부가 많았는데, 요즘엔 아이와 함께 오는 젊은 부부들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매서운 추위 속에 떠나는 한겨울 가족여행길, 부부·가족을 위해 마련된 뜨거운 온천욕실에서 언 몸 녹이며 정담을 나누고, 때도 밀어주며 오붓한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지. 움츠러들었던 몸도 마음도, 대화와 스킨십을 나누는 동안 온기가 돌고 한결 개운해질 게 틀림없다. 단, 가족탕의 숙박시설들은 최근 새로 내부를 개조한 곳이 아니면 허름한 모텔 수준이 많다는 점 염두에 두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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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관 온천 입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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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좁아도 수질은 최고 아산 신정관 온천탕
1300년 유래를 간직한 충남 아산의 온양온천. 고급 온천호텔과 최신식 시설의 대규모 온천탕이 들어서 관광객을 맞는 가운데, 작고 비좁아서 색다르고, 낡고 오래돼서 눈길 끌고 인기 끄는 옛날식 온천탕이 있으니, 온양온천역 부근 온양전통시장(온천시장) 앞 도로변에 자리잡은 신정관이다.
일제강점기 온양온천주식회사가 경영하다 지역 철도회사 소유를 거쳐 광복 뒤 교통부에서 관리하던 온천탕으로, 탕정관과 함께 온양의 대표적인 대중온천탕이었다고 한다. 그 뒤 적자가 심해져 민간인한테 넘겨졌던 것을 황해도 출신의 문여근(79)씨가 인수해 40여년째 운영하고 있다. 이곳이 정겨운 건, 40여년 전 소박한 욕탕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다.
분리된 남녀 출입구, 옛날식 초록색 담배판매점 표지가 붙은 매표소의 유리창 밑 구멍으로 3000원을 내면 내주는 빨간색 ‘입욕권’ 딱지, ‘드르륵’ 여닫이문을 열면 펼쳐지는 “베니다판 깔구 주황색 뼁끼 칠한” 삐걱거리는 탈의실 바닥, 그 한가운데 놓인 낡은 평상, 주전자 물이 끓는 연탄난로…. 실내 풍경이 거의 30~40년 전 모습 그대로다. 평상에 내복 차림으로 앉은, 얼굴이 반질반질해진 어르신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랴, 어딜 가 봐두 역시 여기 물이 최고여” 하며 찬사를 연발한다.
“왜정 때지. 내가 여섯살 때부터 천안서 아부지 손잡구 다니던 데여, 여기가. 가려움증 없애는 덴 아주 최고여.”(천안에서 온 주상현씨·84)
유리문을 열고 욕실 안으로 들어서면 부연 김이 눈앞을 가린다. 자욱한 김, 그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여기저기 땜질한 하늘색 타일 바닥, 어르신들 몸 담그고 눈 지그시 감은 둥근 욕조도 옛날 모습이다. 그 흔한 사우나도, 휴식의자도, 벽그림 장식도 없다. 온도 표시도 없는 온탕·냉탕 욕조 2개뿐, 보이는 거라곤 둥근 벽시계 하나가 전부다. 온탕 물은 생각보다 더 뜨겁고, 냉탕 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차갑다. 이 역시 아련하게 떠오르는 어린 시절 그 느낌이다.
“뽑아올린 섭씨 59도짜리 온천수를 43도로 식혀서 쉬지 않고 욕조로 공급해요. 물이 욕조로 넘쳐흐르니 늘 깨끗한 수질이 유지되지.” 30년 동안 욕탕 관리 일을 해왔다는 장나성(80)씨는 얼굴 피부가 유난히 매끄럽고 젊어 보인다. “안 좋을 수가 있나암? 매일 온천을 하니께.”
온천수도 욕탕 운영도 옛날 방식을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있는 ‘온양온천 원탕 1호’ 신정관. 건강과 추억을 함께 건지려는 전국 각지의 어르신들과, 호기심 많은 젊은층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입욕료 3000원, 수건은 200원에 빌려준다.
부산 충주 아산/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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