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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29 17:33 수정 : 2014.01.29 18:27

국내 첫 번역협동조합의 조합원들이 사업자등록증을 받은 지난해 8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주민센터에서 1차 조합원총회를 열고 있다. 번역협동조합 제공

사회적 경제 / 국내 첫 ‘번역협동조합’

외국어를 전공한 남편과 아내, 대학 동문, 그 동문의 친구들이 모였다.

“눈이 번쩍 뜨였어요. 서광이 비쳤지요.” 번역협동조합(www.transcoop.net)의 최재직(39) 사무국장은 지난해 5월 처음 협동조합 교육을 받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거구나 하는 느낌이 확 들었어요. 큰돈은 못 벌어도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고 결심했죠. 제 가슴속에 늘 언어 공부한 사람의 ‘로망’이 있었거든요. 통역하고 번역하는 사람들의 협동조합을 세우는 거죠.” 최 사무국장은 12년 동안 하던 보험영업을 그날로 접고, 협동조합과의 ‘연애’에 푹 빠져들었다.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한 최 사무국장은 아내 이수경(36)씨부터 설득했다. 대학 후배로 아랍어 전공자인 아내는 삼성전기에서 번역사로 6년간 근무한 뒤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었다. “번역사들이 제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협동조합 만들어 제대로 대우받으면서 우리가 좋아하는 번역 일을 함께 하자고요. 제가 보험영업은 잘 못했지만, 좋은 번역 일감 따오는 영업은 정말 잘하고 싶었습니다.”

처음엔 시큰둥하던 아내 이씨도 금세 든든한 협동조합 동반자가 됐다. “협동조합은 돈보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였잖아요. 협동조합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을 다들 갖고 있으니까, 그런 게 든든한 힘이 되더라고요.” 지난해 6월 한달 만에 일사천리로 설립한 번역협동조합 창립총회에서는 아예 이사장직을 맡았다. “처음에 당장 나서는 사람이 없다 보니 제가 우선 이사장을 맡았습니다. 이사장이래야 따로 월급도 없고 의무와 책임만 큰 자리잖아요.”

지난해 10월에는 서대문구청이 후원해 홍제천에서 벌인 사회적 경제 홍보행사에 참여했다. 이수경 이사장과 최재직 사무국장 부부 모습. 번역협동조합 제공

조합원도 차곡차곡 쌓여 이제 75명으로 불어났다. 지난해 8월 사업자등록증을 받은 지 불과 반년 만이니 적지 않은 수다. 통·번역 일을 하는 대학 동문들이 최씨 부부의 열정에 동참했고, 조합원이 된 번역사 동문이 친구를 조합원으로 데려왔다. 11개 언어를 즉시 진행할 수 있고 최고 수준의 동시통역사도 여럿 보유하고 있으니 이제 웬만한 번역 에이전시보다 역량도 뛰어나다. 누리집에서는 통·번역사들의 이력도 자신있게 공개한다.

조합원 75명 중 실제 번역 일을 하는 조합원은 46명. 그중 25명이 전업이고 나머지 21명은 부업으로 번역을 한다. 재미있는 것은 번역 일을 하지 않는 29명의 역할이다. 변리사, 변호사, 기자, 은행원, 약사, 노무사, 디자이너, 은행원, 펀드매니저 등 직업도 각양각색이다. 최 사무국장은 “번역협동조합 매출의 70%는 조합원들의 일터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번듯한 직장을 가진 비번역사 조합원들이 든든한 영업자 구실을 하는 것이다.

방송사의 카메라기자인 조창현(39)씨도 번역협동조합의 맹렬 조합원이다. “다큐물을 비롯해 방송국의 영상 번역을 여러 편 소개해줬어요. 우리 조합원의 다수가 같은 대학에서 언어를 전공한 사람들이에요. 번역 일에 관심이 많고 서로 쉽게 마음을 열고 도움을 주게 되죠.” 법률과 금융 등 전문 분야 번역에서는 이들 조합원이 최고의 ‘번역 품질 관리’를 책임지는 고급 감수자이기도 하다.

번역협동조합의 가장 큰 무기는 번역사들이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점이다. 기존 에이전시보다 수수료율을 상당히 낮춰 번역하는 사람이 매출의 70%를 가져간다. 나머지 30%의 배분 원칙도 투명하다. 상근영업자인 최 사무국장의 급여로 10%, 일감을 따온 사람에게 10%의 영업수수료를 지급하고 나머지 10%는 재투자를 위해 내부에 적립한다. 고정비 지출을 줄이기 위해 별도 사무실을 두지 않고 있다.

다른 협동조합의 조합원한테서 선물받은 ‘번역협동조합’ 손글씨. 번역협동조합 제공

사업 착수 몇달 만에 굵직한 국제포럼의 진행을 맡는 행운도 누렸다. 지난해 11월 서울시에서 사흘 동안 연 국제사회적경제포럼에서 전체 번역과 일부 통역을 맡았다. 최 사무국장은 “협동조합들의 사회적 경제 행사인데, 통·번역도 협동조합에 맡기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협동조합 간의 협동’이라는 아름다운 협동조합 문화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번역협동조합의 활약이 알려진 때문인지 벌써 ‘2호 번역협동조합’(한국전문번역사협동조합)도 생겨났다.

번역협동조합의 올해 목표는 소박하지만 야무지다. 협동조합을 포함해 사회적 경제 부문에 특화한 전문 통·번역 브랜드를 확실히 굳히고, 우선 2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것이다. 7월에 열리는 협동조합 주간 같은 사회적 경제 행사에서 두드러진 소임을 맡고, 11월 국제사회적경제포럼 행사에서는 통역까지 통째로 맡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최 사무국장이 정한 자신의 임무는 세가지다. 번역 일감을 따오는 영업이 첫째이고, 나머지 두가지는 신규 조합원 유치와 기존 조합원 찾아가기다. 조합원을 만나고 마음을 나누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이다. “따로 일하는 번역사들의 업무 특성상 조합원들이 자주 만나기가 어려워요. ‘협동’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제가 더 뛰어다녀야죠.”

김현대 기자 koala5@hani.co.kr


>>> 협동조합 새 흐름

수수료율 높은 업종·전문직

협동조합 결성 사례 잇따라

중간수수료를 많이 떼이는 개인사업자들이나 혼자서 일하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협동조합을 결성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이수연 연구원은 “협동조합을 세우면 중간에서 떼이는 수수료율을 낮춰 조합원의 실질소득을 높일 수 있다. 퀵서비스협동조합이나 번역협동조합이 좋은 사례”라고 말했다. 실제로 퀵서비스 기사들은 협동조합을 세워 수수료율을 10%포인트 정도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만큼 퀵서비스 기사들의 수입을 늘릴 수 있다. 번역협동조합의 최재직 사무국장도 퀵서비스 사례에서 협동조합 설립의 힌트를 얻었다.

1인출판사, 그림책 작가, 영상제작자 같은 전문직 종사자에게도 협동조합이 제격이다. 서울 마포의 1인출판협동조합, 그림책작가협동조합, 미디어콘텐츠창작자협동조합이 지난해에 연이어 세워졌다. 번역협동조합도 따로 일하는 전문직 종사자들의 협동조합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 유형에 속한다.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던 개별 전문직 종사자들이 당연한 경제적 권리를 누리거나 되찾는 데 협동조합의 힘은 상당히 효과적이다. 1인출판사들은 협동조합을 세워 공동 마케팅을 벌이고, 그림책 작가들은 대형 출판사의 횡포에 공동 대응할 수 있게 됐다. 영상제작자들은 자존감을 높이면서 능동적으로 창작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이들 협동조합을 세운 사람들은 “모이니까 힘이 되더라”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이수연 연구원은 “홀로 외롭게 일하던 전문직 종사자들은 협동조합을 세워 경제적 이익을 얻으면서, 다른 한편으론 보호받는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크게 누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현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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