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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고정관념을 받아들이면 그림처럼 여학생은 읽기를, 남학생은 수학을 잘하는 것으로 내면화하기 쉽다. 바일록 교수 유튜브 강의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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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온 / ‘수학 불안’ 따져보기
지난달 3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12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피사)’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평가에서 우리나라 열다섯살 학생의 수학 성적은 평균 554점으로 조사 대상인 65개국 가운데 5위, 오이시디 가입국에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자랑스럽고 뿌듯한 결과다. 그런데 성적은 1등이었지만 수학을 공부할 때의 흥미나 즐거움, 수학 문제에 대한 자신감, 자신의 수학 능력에 대한 믿음 같은 항목에선 거꾸로 거의 꼴찌에 가까운 수치를 보여주었다. 모순에 가까운 이런 결과는 어디에서 비롯했을까? 성적은 1등, 흥미와 자신감은 거의 꼴찌로 나타난 상황은 입시 과열이 빚어낸 슬픈 자화상이면서 동시에 ‘수학 불안’ 또는 ‘수학 울렁증’이 여전히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논리와 합리적 사고를 길러주는 장점은 외면한 채 수학이 상급학교 진학에 필요한 주요 과목의 고득점 수단으로만 강조되다 보니, 학생들이 수학을 잘하면서도 싫어하고 불안해하는 것이다. 수학이 골치 아픈 건 그저 기분일까? 수학은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는 사람이 많다. 그저 기분일까? 수학 불안이 일으키는 뇌 반응이 실제 몸이 아플 때와 비슷하다고 보고한 2012년 미국 시카고대학 연구팀이 <플로스원>에 발표한 연구 결과를 보자. 연구팀은 수학 불안이 큰 집단과 작은 집단을 나눠 수학 문제와 단어 문제를 푸는 동안 이들의 뇌에 나타나는 반응을 살폈다. 쉬운 문제를 풀 때에는 두 집단 사이에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를 풀 때, 수학 불안이 큰 집단은 단어 문제에 비해 수학 문제를 더 못 푸는 모습을 보였다. 뇌 반응과 연관성을 살펴봤더니 수학 불안이 클수록 어려운 문제를 풀기 전에 통증 인식에 관여하는 뇌 부위(섬엽 등)가 활성을 띠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수학 불안이 작은 집단에선 이런 양상이 관찰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일방적 이별 통보처럼 사회적으로 거절을 당해 가슴이 쓰릴 때에도 이런 뇌 영역이 활성화하는데, 수학 불안이 높은 사람들도 수학 문제를 풀기 전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아픈 불편을 겪는다는 얘기다. 수학 문제 앞에서 골치가 아프다면 괜히 그런 게 아닌 것이다.수학 문제 앞에선 ‘아, 머리 아파’
뇌영상 보면 통증 반응과 비슷
불안 클수록 제 실력 발휘 못해
‘여자는 수학 못해’ 고정관념 한몫
한국 청소년 성적 상위, 흥미는 하위
합리적 사고 즐길 줄 아는 문화를
수학 불안이 성적에도 영향 그러니 수학 불안은 당연히 성적에도 영향을 준다. 흔히 수학 불안은 수학 문제가 어려워지고 복잡해지는 중·고교 시절에 주로 나타난다고 여기겠지만, 최근 연구에선 더 어린 학생들도 수학 불안을 느끼는 것으로 보고된다. 2012년 미국 스탠퍼드대학 연구팀의 연구에선 수학 불안이 심지어 초등학교 1학년생한테도 나타나며 그런 불안이 낮은 성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왜일까? 신경과학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수학 불안이 큰 학생이 문제를 풀 때에는 대체로 부정적 감정과 연관된 뇌 영역이 크게 활성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지나치게 활성화한 이 영역을 조절하느라 뇌가 분주해지면서, 정작 문제 풀이에 필요한 뇌 기능인 ‘작업 기억’이나 ‘수리 능력’은 오히려 줄어든다. 즉 수학 불안으로 인해 문제 풀이 능력이 감소한다는 것이다. 혹시 수학 불안이 큰 학생은 원래 실력이 부족해 그런 건 아닐까? 그러나 수학 불안이 큰 학생과 작은 학생은 모두 지능이나 학업성취도, 작업 기억에선 별 차이가 없었다. 이는 수학 불안이 큰 학생이 불안감으로 문제를 잘 풀지 못함을 뜻한다. 동등한 능력을 갖고 있는데도 단지 수학 불안 때문에 뇌의 문제 풀이 능력이 줄어 더 나은 성적을 받지 못한다면 학생과 부모는 누구라도 몹시 속상한 일이다. 수학 불안 남녀 차이 있을까? 수학 불안이 커 성적이 낮아질 가능성은 남녀 간에 차이가 있을까? 흔히 여자가 수학 불안을 더 크게 느낀다는 연구가 많지만, 남녀 간에 큰 차이가 없다는 연구도 역시 만만찮게 많다. 반면에 남자의 수학 불안이 더 크다고 보고하는 연구는 확연히 적다. 종합하면, 현재 연구에서는 일단 여자의 수학 불안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자칫 여자가 남자보다 수학을 못한다는 ‘남성우월’ 시각의 결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성별에 따른 수학 불안과 수행 능력 차이를 조사한 여러 연구를 보면 그리 예단할 수는 없다. ‘수학 불안’ 외에 ‘시험 불안’까지 다룬 2012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자. 이 연구에서는 여학생의 수학 불안과 시험 불안이 더 크게 나타났지만, 수학 수행 능력의 남녀 차이는 관찰되지 않았다. 즉 여학생이 조금 더 불안해하긴 했지만 수학 실력은 남학생에게 뒤지지 않았다. 여자들이 이런 결과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겠지만 추가 결과를 보면 자신감이 생길 수 있다. 수학 불안보다 더 큰 시험 불안을 통제한 뒤 분석해보니, 남학생과 달리 여학생에게서만 수학 불안이 수학 수행 능력과 밀접한 연관을 보이고 있었다. 달리 말해, 여학생이 더 높은 수학적 잠재력을 갖고 있어도 수학 불안 탓에 이를 잘 발휘하지 못할 수 있음을 뜻한다. 즉 수학 불안감을 잘 통제한다면 ‘여자가 남자보다 수학을 더 잘할 수 있다’라고도 풀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수학 불안의 정체를 응시하기 여자의 수학 실력이 더 뛰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 우리나라에선 예외로 보일지 모른다. 대학수학능력시험 결과를 봐도 대체로 남학생의 수학 성적이 더 높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현상은 실제 남녀 차이라기보다는 사회문화적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40개국 15살 학생들의 동일한 수학 시험 결과를 분석해 <사이언스>에 발표한 2008년 연구에서는 여학생의 수학 평균 점수가 남학생보다 낮았지만, 이런 차이는 남녀가 평등한 국가일수록 감소했다. 여성의 독립성이 높은 아이슬란드에서는 여학생의 수학 점수가 더 높았다. 또한 성별 고정관념은 어릴 때부터 여학생의 수학 성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수학 불안이 큰 여교사와 1년을 보낸 초등학교 1·2학년 학생의 수학 성취도가 떨어졌는데, 이런 현상은 여학생에게서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2010년 미국 연구팀의 연구 결과도 있다. 특히 이런 경향은 ‘남자는 수학을 잘하고 여자는 읽기를 잘한다’ 같은 고정관념을 받아들이는 여학생한테서 더 눈에 띄게 나타났다. 여학생이 여교사를 자신의 역할 모델로 동일화하면서 수학에 대한 부정적 태도의 영향을 받고, 이는 다시 수학 성취도의 감소로 이어진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수학 불안을 극복할 방법은 없을까? 흔히 사람들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걱정이 커지면 가만히 앉아 안정을 찾고자 한다. 그런데 2011년 <사이언스>에 실린 한 연구를 보면,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담는 글을 쓰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하다면 상황을 다르게 해석해 보는 것도 좋다. 예컨대, 불안으로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마구 뛸 때 이를 시험에 ‘불리한 위협’이 아니라 ‘이로운 도전’으로 해석해보자. 이렇게 받아들인 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학생들에 비해 더 높은 수학 성적을 받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수학 불안의 정체를 응시하면서 단기적인 점수 올리기에 연연하지 않는 노력으로 더 많은 사람이 수학에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회가 이뤄지길 소망한다. 세계수학자대회(ICM)가 서울에서 열리는 ‘한국 수학의 해’에. 최강 의사, 르네스병원 정신과장 ※사이언스온의 연재 ‘뇌영상과 정신의학’에 실린 글을 필자가 다듬어 다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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