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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상프로방스의 알베르타 광장에 모인 손미나와 10명의 여행 친구들. 알베르타 광장은 18세기 남프랑스의 풍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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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여행
생애 첫 여행, 첫 지중해 웰컴 투 프로방스 힐링캠프
여행에서 소외된 이들을 초청해 함께 프랑스 남부로 떠난 여행작가 손미나의 아주 특별한 여행기
“앞을 보지 못하지만 지중해의 비현실적인 바다색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요. 어떤 건지 상상이 가세요?”
코트다쥐르의 끝없는 해안선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 전망대에 선 한 동양인 청년이 짙푸른 바닷바람을 머금은 얼굴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시각장애인인 그는 두 눈이 아닌 온몸으로 프랑스를 느꼈고, 가슴 가득 프로방스의 향기를 채웠다. 지난 1월7일부터 1주일 동안, 처음 만난 낯선 이들과 함께 난생처음 해외여행을 떠난 안승준(33)씨의 이야기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길 위의 세상 이야기를 글로 전하며 살기 시작한 지 6년. 그동안 나의 삶은 마치 조화가 생화로 변하듯 생명력을 얻었다. 한층 다채롭고 역동적이며 생생한 감동으로 채워진 그 시간 동안 단언컨대 매일 한뼘씩 성장할 수 있었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렇게 ‘길 위의 학교’인 여행을 통해 값진 경험과 지혜를 듬뿍 안고 5년 만에 돌아온 서울. 대한민국은 ‘꿈꾸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멘토들의 희망적인 메시지로 가득했다. 그러나 현실의 굴레를 뒤집어쓴 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그것은 저 멀리로 사라져가는 아련한 메아리와 같은 것이다.
마르세유의 옛 거리를 거니는 동안
참가자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카메라만 쉴 새 없이 만졌다
그러나 저녁 시간이 되어
최고의 부야베스 레스토랑을
찾았을 때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여행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 없는 초대를 한다는 것이야말로 언뜻 생각하면 현실성 없는 ‘꿈’에 가깝지 않은가. 그런데 뜻밖에도 일단 마음을 먹자 모든 일이 술술 풀려 나갔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떠남’을 선물하고 싶다는 내게 선뜻 손 내밀어 주는 분들이 의외로 많았다. 주한 프랑스관광청과 프로방스 각 지역 관광청, 그리고 여행사 ‘여행박사’에서 항공권과 숙소, 음식, 관광지 방문 허가와 안내를 책임져 주었고 사진작가와 현지 관광가이드들을 비롯한 스태프들까지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이 프로젝트에 재능기부를 해주었다.
그러한 기운 덕분인지 인터넷으로 공고를 하자마자 전국에서 수많은 사연이 쏟아져 들어왔다. 1000통에 가까운 사연을 읽고 이 행운을 거머쥘 참가자들을 선발했다. ‘여권만 들고 오세요, 함께 프로방스로 가요’라는 로고처럼, 빳빳한 새 여권을 손에 든 여행 친구 10명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슴에 품고, 여행에 대한 설렘과 약간의 두려움을 안은 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1월7일 오전 11시. ‘여행’을 선물하고 싶다는 나의 꿈을 용기 내어 입 밖으로 내뱉은 지 딱 두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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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의 교황청. 그 존재만으로도 위엄을 떨치듯 웅장한 건물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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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프랑스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도시 마르세유에서 시작되었다.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을 거쳐 지중해의 역사를 한자리에 모아 놓은 박물관을 관람하고, 마르세유의 옛 거리를 거닐다 수제 비누 공장에서 체험도 해보는 동안 참가자들은 여전히 어색한 표정으로 각자 손에 들린 카메라만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저녁 시간이 되어 미슐랭 가이드에서 으뜸으로 꼽는 최고의 부야베스 레스토랑을 찾았을 때는 우리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이 이미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여행의 두번째 밤을 맞았을 때, 우리는 촛불을 밝힌 채 서로의 속깊은 이야기를 쏟아놓기에 이르렀다.
가장 먼저 외교관을 꿈꾸는 고3 배승아군이 말문을 열었다. 남해의 작은 섬 조도에서 온 승아는 학용품 하나도 쉽게 구하기 힘든 환경인데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원하는 대로 외국어를 공부하기엔 걸림돌이 많았다. 그런 배승아군에게 첫 여행지가 서울도 아니고 프로방스였다니! 이번 여행은 그야말로 ‘꿈은 이루어진다’(dream come true)였다.
다음으로는 이민우(19)군이 사연을 털어놓았다. 어릴 적부터 백혈병을 앓았고, 어느 정도 치료가 되었을 때는 발목에 낭종이 생기고 척추에도 이상이 왔다. 항암치료 중에는 친구들의 놀림으로 ‘왕따’까지 경험했다. 사실 민우는 첫날부터 매우 눈에 띄는 참가자였다. 얼굴을 많이 가리는 헤어스타일과 안경, 약간은 구부정한 어깨에 자신감 없는 걸음으로 무리에서 항상 한발짝 떨어져 있곤 했기 때문이다. 소심한 성격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되기도 하고 너무나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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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 ‘햇살의 도시’로 불리는 남프랑스 교육·상업의 중심도시 엑상프로방스 거리. 폴 세잔의 고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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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정양은 5살 때 갑작스런 부모님의 이혼으로 엄마와 둘이 도미했다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연으로 얼룩진 미국 생활 뒤에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어느 날 엄마가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가버렸다. 용기 내어 아빠를 찾아가 보았지만 무정한 새엄마의 학대를 못 이겨 다시 집을 나왔고, 홀로 새 삶을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악착같이 고등학교를 마친 이 당찬 열아홉의 아가씨는 이번에 한남대학교 전체 수석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한창 예민할 사춘기에 의료 사고를 당해 시각장애인이 된 안승준군은 다른 이들의 사연을 알고 나니 자신은 행운아인 것 같다는 고백을 했다.
“저도 처음엔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자기가 가진 장애나 어려움을 완전히 극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그것에 익숙해진 나머지 제아무리 좋은 다른 조건과 바꾸자고 해도 싫다고 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 저는 지금 남들보다 약간 불편한 것이 있긴 하지만 좋은 점도 많아서 누군가가 자신의 아픔과 바꾸자고 한다면 싫다고 할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의 사연 앞에서 저는 한없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음껏 울었다. 아무 말 못하고 눈물만 흘렸지만, 모두 한마음이 되어 서로를 위로하고 위로받고 있었다. 어색함과 멋쩍음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행복함과 끈끈함이 우리 사이를 채우게 된 기적 같은 밤이었다. 여행지였기에, 여행 친구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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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 마르세유의 옛 항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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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우리는 ‘분수의 도시’ 엑상프로방스로 향했다. 엽서 속 풍경이 튀어나온 것처럼 예쁘고 아기자기한 남프랑스 소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10명의 참가자와 나는 꼭 잡은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세상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열정을 불태웠던 대가 폴 세잔의 명작들에 등장하는 생트빅투아르 산을 함께 오르고, 할머니 손맛으로 지어진 프로방스 전통 음식을 먹으면서, 아비뇽의 교황청에서 역사의 숨결을 가슴 깊이 빨아들이며 감탄하던 순간에도, 생베네제 다리를 건너며 노래를 흥얼거릴 때도 우리는 여행이 주는 최고의 선물을 가슴에 품을 수 있어 행복했다.
여행 마지막날, 참가자들은 입을 모아 이런 고백을 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이젠 정말 용기 내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혼의 치유를 받아 부정적인 기운을 몰아냈기 때문일까? 단 1주일 만에 참가자들의 얼굴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특히 언제나 무리 밖에 머무르던 이민우군에게는 큰 변화가 있었음이 한눈에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안경을 벗고 머리카락을 뒤로 시원하게 넘겨 얼굴을 드러낸 채 어깨를 반듯하게 펴고 당당히 걸었으며, 사진을 찍을 때마다 가장 뒤에 또는 가장자리에 어색하게 서 있는 대신 무리의 중심으로 파고들어 활짝 웃고 있었다. 아마도 이 청년에게 일어난 변화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인 아름다운 바람과 똑같은 모습이었으리라.
정말로 실현될 것이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번 프로방스 여행을 통해 삶이 변화한 것은 비단 참가자들만이 아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그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던 나 자신이야말로 일생일대의 큰 선물을 받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부디 이러한 작은 파도가 지속될 수 있도록 ‘참되고 선한 의지’를 지닌 많은 독지가들의 도움이 이어지기를 희망해 본다.
프로방스(프랑스)/글 손미나(여행작가)
사진 센가 레이나(일본 사진작가)
>>>여행정보
이것만은 놓치지 마세요
파리에서 마르세유 가기 마르세유로 바로 가는 직항이 없어 파리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한다. 파리 공항에서 마르세유까지 비행기로 1시간20분. 단, 파리에서 머물 계획이 있다면 공항에 오가는 시간을 고려해 리옹 역에서 3시간 정도 걸리는 고속열차 테제베(TGV)를 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마르세유에서 엑상프로방스 가기 마르세유에서 엑상프로방스까지는 차로 40분 거리다. 왕복 버스나 기차를 타도 비슷한 시간이 걸린다. 정차역이 시내에 있는 일반 기차(TER)를 타는 게 가장 좋다.
엑상프로방스에서 아비뇽 가기 테제베 엑상프로방스 역과 아비뇽 역은 15분 거리다. 그러나 아비뇽 테제베 역이 시내와 떨어져 있어 다시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일반 열차 시간과 다르지 않다. 둘 다 1시간 정도 걸린다.
마르세유 추천 음식 마르세유의 명물인 어패류 요리 부야베스를 꼭 먹어봐야 한다. 작은 생선과 조개류 등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나, 비린내가 적게 나는 흰살생선을 쓰기도 한다. 따로 조개와 갈릭파우더·타임 등을 넣어 끓인 국물을 큰 수프볼에 담아 함께 내고, 건더기는 따로 먹을 수 있도록 빵을 곁들인다. 추천 음식점은 코르니슈에 있는 ‘르 륄’. 프리울 섬 등 멋진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고, 프랑스 유명인사들이 마르세유를 찾으면 꼭 들르는 곳이다.
엑상프로방스의 추천 관광지 엑상프로방스 근교에 있는 와인 명가 ‘샤토 라 코스트’. 와인이 유명하지만 다양한 야외 전시물들도 볼만하다. 건축가 장 누벨이 디자인한 술 창고가 있고 알렉산더 칼더, 루이즈 부르주아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조각공원도 있다. 2011년에는 또다른 거장 안도 다다오가 디자인한 아트센터도 들어섰다. 뛰어난 품질의 올리브오일과 오가닉 와인 쇼핑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아비뇽의 추천 관광지 생베네제 다리. 프랑스 민요 ‘아비뇽의 다리 위에서’에 등장하는 다리다. 12세기 처음 놓였을 당시엔 21개의 다릿발과 22개의 아치로 이뤄진 길이 900m의 다리였다. 당시 최고의 토목기술로 지어진 다리로, 다리 건설에 기여한 성직자 베네제를 기리기 위한 생니콜라 예배당이 다리 북쪽에 있다. 론강의 홍수와 범람으로 인해 유실과 파손, 붕괴를 거치며 여러 차례 보수를 했으나, 1680년 완전히 무너진 뒤 현재는 4개의 다릿발과 3개의 아치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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