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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28일, 전남 완도군 소안도 비자리 포구 앞바다에서 고니(백조)들이 힘차게 날아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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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여행
일제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전남 완도군 소안도…은은한 매화향에 고니들이 노니는 그림 같은 봄풍경
6천 주민 중 800명이
‘불령선인’ 낙인
89명의 항일 독립운동가 배출
‘항일의 섬’ 별명답게
섬 전체 태극기 나부끼는
애국의 섬으로
3월은 항일 독립만세운동의 달. 1919년 3월뿐 아니라 4월 이후까지 전국의 거리와 장터에서 강변에서, 태극기 물결 일렁이는 가운데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운동의 함성이 이어졌다. 선인들의 고통과 희생도 이어졌다. 전남 완도군에 돋보이는 항일운동 근거지가 있었다. 소안도. 일제와 그 앞잡이들이 듣기만 해도 치를 떨 만큼 끈질기고 격렬하게 또 조직적이고 후련하게 저항했던 섬이다. 인구 2700명(현재)의 작은 섬이지만, 정부 건국훈장을 받은 20명을 포함해 89명의 항일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소안도가 ‘항일의 섬’ ‘독립항쟁의 성지’로 불리는 이유다. 일제 침략과 만행을 부정하는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이어지고 중국발 미세먼지가 나라를 덮어 답답했던 지난주, 선인들의 항일운동 발자취와 함께하는 소안도 봄맞이 여행을 다녀왔다. 시야는 흐렸어도, 산자락에선 매화향이 은은하고 물가에선 새하얀 백조(고니)들이 떼지어 노닐어 그림 같았다.
완도 화흥포항에서 뱃길 따라 50분, 소안항 선착장에 발을 딛자 ‘항일 성지 소안도’ 빗돌과 함께 관광안내판 뒤로 도열해 펄럭이는 큼직한 태극기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소안도의 별칭이 ‘태극기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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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항 선착장에 걸린 ‘자지도 등대 습격 의거일’ 기념 펼침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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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항일운동기념관에 전시된 소안도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부조. 맨 왼쪽이 송내호 선생, 둘째가 정남국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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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도는 2012년부터 1년에 걸쳐 15개 마을 1361가구 모든 집에 태극기 게양을 마치고, 2013년 8월 ‘소안도 나라사랑 365일 태극기섬 선포식’을 열었다. 마을마다 집마다 1년 내내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이는 전국 유일의 고장이다. “항일 독립운동에 몸 바친 선인들의 정신을 되새기면서 ‘항일의 섬’ 소안도를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대욱 소안항일운동 기념사업회장)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선착장과 비자리 거리에 걸린 펼침막이다. ‘경축, 105주년 자지도 등대 습격 의거일’. 소안도의 항일투쟁을 알기 위해선 소안도에 딸린 작은 섬 자지도(당사도)를 알아야 한다. ‘자지도 등대 습격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일제의 대륙 진출 야욕이 극에 달했던 1909년 1월, 일제는 남해를 지나는 자국 상선의 항해를 위해 자지도에 등대를 세우고 일본인 등대수들을 배치했다. 등대가 불을 밝힌 지 두달이 채 안된 2월24일, 동학의병에 참여했던 이준화 선생 등 소안도 주민 7명은 일본 상선의 항해를 방해하기 위해 등대를 습격했다. 일본인 등대수 4명을 처단하고 등대 기기를 파괴했다. 주민들의 기개를 보여준 이 사건은 1920년대 소안도 항일운동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자지도 지명 이야기 한 토막. 자지도의 이전 이름은 항문도였다. 조선시대 육지로 드는 관문 구실을 하는 섬이어서 항문도(港門島)라 부르다가 자지도(者只島)로 바꿨다고 한다. “둘 다 발음하기가 거시기해서” 1982년 당사도(당나라와 무역 때 상인들이 무사고를 비는 제를 올렸던 섬이란 뜻)로 다시 바꿨다. 하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자지도가 더 익숙하다.
소안도 일대가 육지로 드는 관문이었다는 건 비자리 도로변에 선 조선시대 빗돌에서도 드러난다. 불망비 3개 중 2개가 제주목사 영세불망비다. 제주목사가 부임하고 퇴임 때 이 섬에 머물다 갔다는 증거다. 소안도(所安島)란 지명도, 험난한 항해를 하다 비로소 닿은 ‘안전한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어쨌든 소안도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은 1920년대 절정을 이루어 함경도 북청, 경상도 동래와 함께 3대 항일운동 근거지로 자리매김됐다. 당시 6000여명의 섬 주민 가운데 800여명이 ‘불령선인’(일제가 자신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조선인을 지칭하던 말)으로 낙인찍혀 통제와 감시 대상이 됐을 정도다. 주민들은 항일 비밀결사 모임인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살자회 등을 만들어 조직적인 저항운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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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항일운동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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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면 소재지인 비자리 포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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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심에 송내호(1895~1928) 선생이 있다. 이목리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 중앙학교를 졸업한 뒤 소안도로 돌아와 사립 중화학원 교사를 지내며 각종 항일단체를 주도적으로 결성해 끈질기게 저항했다. 1919년 3월15일 완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초대 간사도 맡았다.
소안도는 본디 두개의 섬이었는데 모래가 쌓이면서 하나로 이어졌다. 이어진 부분이 과목해변인데 이곳 가학리에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이 있다. 여기서 송내호 선생을 비롯한 주민들의 항일운동 활약상을 확인할 수 있다. 기념관 앞에 선 목조건물이 복원해 놓은 옛 사립 소안학교다. 송내호와 뗄 수 없는 이름이 1923년 설립된 ‘사립 소안학교’다.
소안도는 본디 나라에서 관리하던 무기 제조용 목재 보급지였고, 왕실에 세금을 내던 궁납전이었다고 한다. 일제가 사도세자 5세손인 이기용(일제가 자작 칭호를 내린 자다)에게 소안도 땅 소유권을 주자, 주민들은 13년간 소송을 벌인 끝에 승소해 섬을 되찾았다. 이를 기념해, 주민들이 돈을 모아 옛 중화학원을 개편해 설립한 학교가 사립 소안학교다.
비자리 버스·택시 승차장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이목리 주민 백익선(86)씨는 “우리 아부지가 바로 사립 소안학교 1회 졸업생이오” 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주민들은 ‘사립 소안학교’를 말할 때 앞에 ‘사립’이란 말을 반드시 붙인다. 일제가 세운 공립학교와 구분하기 위해서다. 사립 소안학교는 192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기까지 주변 섬들에서까지 몰려온 수백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폐교 뒤엔 주민들이 끈질긴 복교운동을 펼쳤지만 무위로 끝났다.
주민들이 이 학교를 세운 목적 자체가 민족운동가를 배출하는 데 있었다고 한다. 일본 국경일 행사를 거부했고, 일장기도 걸지 않았으며, 각종 행사 때 일본 경찰의 입회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강력한 저항정신과 행동을 이끈 분이 송내호 선생이다. 송내호는 1927년 일경에 체포돼 복역하다 폐렴이 악화돼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1928년 34살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목리 야산에 송내호·기호 형제 가족묘가 있다.
비자리 포구 제일장여관 뒤로 낡은 단층주택이 하나 붙어 있다. 송내호 선생이 한때 살던 집이다. 이 집은 일제강점기부터 30여년 전까지 소안도 유일의 여인숙(낙양여인숙)이었다고 한다.
소안도를 차로 한바퀴 둘러보는 데는 2시간이면 충분하다. 전복과 김으로 이름난 완도에서도 소안도는 김 양식으로 이름높다. 섬 동쪽 바다에선 주로 김을, 보길도·노화도를 마주 보는 서쪽 바다에선 주로 전복을 키운다.
김발에서 파래 제거 작업을 하고 돌아오던 노금태(65·북암리)씨가 말했다. “여그(소안도)서 완도 전체 김의 한 칠십 프로가 나는디, 다 김밥용 김이지라우. 품질이 좋은게로 일본 수출도 허고.”
소안도 주민들의 자랑거리이자 아름다운 볼거리가 미라리 상록수림(길이 400m, 너비 35m)과 맹선리 상록수림(길이 300m, 너비 35m), 두 천연기념물이다.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심은 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방풍림이다. 후박나무·구실잣밤나무·생달나무 등 아름드리 상록수 숲이 울창하다.
비자리와 이목리 사이엔 바닷물이 드나드는 커다란 호수가 있다. 앞의 작은 섬 죽도를 도로로 연결하면서 만들어진, 주민들이 ‘원안’이라 부르는 내해다. 원안은 해마다 고니(백조)들이 떼지어 날아와 겨울을 나는 철새도래지다. 10여년 전 몇마리가 처음 눈에 띄더니 해마다 수가 늘어 이번 겨울엔 200마리 이상이 날아왔다고 한다. 12월쯤 날아와 3월 중순까지 머물다 간다. 소안면 노인회장 백서식(80)씨가 말했다. “보닝게로 고놈이 인자 물고기를 잡아묵는 것이 아니고 ‘짐질’(수초의 일종) 뿌리만 파묵어. 줄기는 내뿔고.” 지난 2월28일 현재 50~60마리의 고니들이 비자리 포구와 ‘원안’을 오가며 남아 있었다.
소안도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 2시간이면 오르내릴 수 있는 가학산이다. 정상에 오르면 북쪽 대봉산 쪽과 가느다란 사주로 이어진 풍경이 아름답고, 맑은 날이면 제주도 한라산까지 눈에 잡힌다지만 지난주엔 미세먼지가 자욱해 코앞의 섬도 보이지 않았다. 가학리에서 미라리로 넘어가는 길 옆에 ‘운동장 쉼터·약수터’가 있다. 가학산 등산로 입구다. 운동장 쉼터란 이름도 일제강점기 사립 소안학교 학생들이 쓰던 운동장이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
소안도(완도)/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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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항 먹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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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안도 여행정보
가는 길 수도권에서 서해안고속도로~목포~강진~남창~완도~화흥포, 호남고속도로~광주~나주~영암~강진~남창~완도~화흥포. 화흥포에서 소안도행 청해진카페리호가 아침 7시~오후 5시10분, 대략 1시간 간격으로 하루 10회 운항한다. 뱃삯 1인 7700원, 승용차 2만원(운전자 뱃삯 포함). 소안도엔 마을버스가 1대, 택시가 4대 있다. 당사도(자지도)행 배는, 노화도 이목항에서 출발한 배가 소안항을 거쳐 하루 2회 왕복한다.
먹을 곳 허름한 식당들이 소안면 소재지인 비자리에 몰려 있다. 1인분 식사를 팔지 않는 곳이 많다. 소안식당·동창식당·청포도식당은 회·매운탕 등 해산물 음식을 예약받아 내고, 작은섬식당은 백반을 낸다. 오가는 길에 완도항에 들르면 다양한 식사를 할 수 있다. 여객선터미널 들머리 삼거리의 ‘아시나요’는 전복회덮밥(사진·1만2000원) 등 전복 음식을 잘하는 집. 장어탕·매운탕·연포탕도 낸다.
묵을 곳 숙박시설은 좋지 않다. 펜션이 1곳, 여관이 5곳(비수기 평일 2만~3만5000원) 있다. 민박집(2만~5만원)도 7~8곳 있다.
소안도 여행 문의 소안면사무소 (061)550-6530, 완도군 관광안내소 (061)550-5151, 화흥포항 대합실 (061)555-1010, 소안항 대합실 (061)553-8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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