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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3.26 19:41 수정 : 2014.03.27 16:20

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

[매거진 esc] 성석제의 사이(間) 이야기
2007년 3월 영하 25도의 미국 뉴욕주 스키장, 한밤의 숲 속에서 만났던 꿈의 작업실

2007년 3월, 칠레에 다큐멘터리 촬영차 다녀오는 길에 캐나다에 들렀다. 동생 가족이 서너 해 전에 토론토로 이민을 와 있었고 칠레를 오가는 항공편의 중간 기착지에 토론토가 들어 있어서였다.

동생은 차를 가지고 공항에 마중을 나왔다. 그때만 해도 생소한 ‘국제 로밍’으로 전화를 건다는 건 비싸서 엄두를 내지 못했다. 늘 가지고 다니는 노트북 컴퓨터를 켜고 헤드셋을 썼다. 공항에서 10분 동안 무료로 제공하는 와이파이에 잽싸게 연결, 공짜 전화프로그램인 스카이프로 전화를 해서 5년 만에 동생을 만났다.

한 달 가까이 집을 떠나 있다 보니 뭔가를 읽고 싶다는 기갈이 심했는데 동생 집에 있는 한글로 된 책은 번역소설 몇 권과 기업인의 성공담을 빼면 실용서가 대부분이었다. 이야기의 단맛이 우러나오는 책은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좀 쉬운 영어로 된 동화책이나 추리소설이라도 볼까, 아니 읽어지는지 시험해 볼까 싶어 동네 도서관으로 갔다. 만만한 책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쯤 어슬렁거리다가 한글로 된 책이 백여 권쯤 꽂혀 있는 코너를 발견했다.

‘이게 웬 떡이냐’ 하는 환호도 잠시, 책들의 대부분이 1980년대에 이민 온 사람이 기증한 듯 군사문화에 찌든 논설을 담은 칼럼집이나 ‘세상은 넓고 실패는 없다’는 식의 철 지난 내용이었다. 그런데 몇 권은 비교적 최신작이었다. 그러니까 나도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는, 안면만 있는 아름다운 여성 작가의 베스트셀러가 들어 있었다. 본인을 만나기라도 한 듯 반가웠다.

한국에 가서 혹시 마주쳤을 때 “선생님 책이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하고도 윌로데일의 동네 도서관에 꽂혀 있습디다. 사람들이 어지간히 많이 빌려봤는지 손때가 잔뜩 묻고 표지가 나달나달하던데요” 하고 말을 붙이는 걸 생각하는 것으로도 즐거워졌다. 나도 책을 쓰는 사람인데 외국의 어느 동네 도서관에까지 내가 쓴 책이 꽂히는 광영을 누릴 날이 언제나 올까. 한숨부터 나왔다. 그러려면 만인의 가슴을 적시는 로맨스나 인류애를 담은 소설을 써야 할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먼 거리에 집이 하나 보였고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쌓인 눈 위에서 미끄럼을 탔다
세상 끝까지 미끄러져 갈 것 같았다
다시 집을 돌아보자
호박색 불빛을 내뿜으며 빛났다

귀국을 열흘쯤 앞둔 어느 날 동생이 스키장에 가자고 했다. 매년 3월 하순, 3박4일 정도의 일정으로 친한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모이는데 장소가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미국 뉴욕주의 레이크플래시드라고 했다. 스키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동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서 미국 땅으로 진입했다. 국경 검문소의 절차는 생각보다는 단순했다. 일행 중 누구도 미국에서 살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지 싶었다.

하지만 미국 땅의 날씨는 만만하지 않았다. 길을 묻느라고 차를 길가에 세워놓고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종업원이 고래 사냥할 때 이누이트족들이 입는 백곰털 외투 같은 것을 입고 모자까지 쓰고 벙어리장갑을 낀 채로 부들부들 떨며 서 있는 것이었다. 난로가 피워져 있긴 했으나 편의점 내부 전체를 덥히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바깥의 온도계를 봤더니 영하 25도였다. 북극도 아닌 곳에서 3월 하순에 영하 25도의 날씨를 만난 기념으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다가 이가 다 부러지는 줄 알았다.

그날 저녁 토론토에서 온 두 가족, 버지니아주에서 온 한 가족, 객식구인 나 해서 어른 아홉 명, 젖먹이 포함한 아이 5명의 대식구가 한집에 모였다. 숲속의 펜션을 3박4일 빌리는 데 우리 돈으로 백만원쯤 줬다고 했다. 처음에는 엄청난 돈이다 싶었는데 세 식구로 나누고 또 인원수만큼 나누니까 간신히 수긍할 만해졌다. 방이 여덟 개쯤, 자쿠지가 있는 목욕탕 포함 화장실이 세 개였다. 난방과 단열이 얼마나 잘되는지 페치카에 장작 몇 개를 집어넣기만 해도 땀이 났다.

세 가족의 가장이 한국의 정치와 세계의 정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열렬한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재미를 찾아나설 수밖에 없었다. 옷을 최대한 껴입고 밖으로 나갔다. 쉰 걸음쯤 걸어가서 뒤를 돌아보자 굵은 나무줄기 사이마다 검은 잉크 같은 어둠이 고여 있는 것이 보였다. 거대한 침엽수 우듬지 위로 황금공 같은 달이 불쑥 떠올랐다. 조용했다. 눈을 밟으며 뽀드득대는 내 발자국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무섭지 않을 만큼의 먼 거리에 집이 하나 보였고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쌓인 눈 위에서 미끄럼을 탔다. 중간에 나무를 이용해 멈추지 않으면 세상 끝까지 미끄러져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집을 돌아보자 따뜻한 호박색 불빛을 내뿜으며 빛나고 있었다. 아, 저놈의 집이 돈값을 하는구나!

저런 집에서 일을 한다면 낙화암 삼천궁녀와 바보 온달 삼천 명이 만나는 로맨스 소설이든 몇백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든 얼마든지 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귀국하면 만사 제쳐놓고 저런 집부터 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십 년 안에 내가 쓴 책이 토론토, 푸에르토나탈레스, 레이크플래시드의 동네 도서관에 꽂히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저런 집을 찾지 못해서일 것이다.

“형, 곰 있어! 들어와!”

동생이 나를 부르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귀국하는 길에 동생이 한글로 된 파일이 담긴 메모리카드를 하나 주었다. 비행기 타고 가면서 심심할 때 한 번 읽어보라고. 중요한 건 거기에 책 한 권 분량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는 것이고 그게 한글로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짐을 맡기고 내가 탈 비행기가 있는 게이트 앞으로 갔다. 두 시간은 남아 있었다. 노트북의 배터리가 충분하지 않아서 충전을 해두어야 했다. 그런데 이미 어떤 사람이 자신의 노트북을 하나밖에 없는 콘센트에 꽂고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노트북을 켠 뒤 동생이 준 파일을 읽기 시작했다.

삼십 분이 지나도 그 인간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 노트북의 배터리는 거의 다 떨어지고 있었다. 한글로 된 이야기는 엄청나게 재미있었다. 배터리가 떨어지면 영영 못 보겠구나 생각하니 재미가 두 배가 되었다. 한 시간이 넘자 그 인간이 갑자기 허둥지둥 전선을 뽑고는 어디론가 달려갔다. 나는 지체없이 그 자리에 플러그를 꽂았다.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런데 아까부터 누군가를 애타게 호출하는 방송이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대충 알아들은 말은 “쑹쑤크제, 쑹쑤크제씨 계시면 게이트 52번으로 지금 즉시 가시기 바랍니다” 하는 것이었다. 홍콩이 중국에 합쳐지는 과정에서 캐나다에 중국계 이민이 대폭 증가했다 하더니 그들 중 한 명이 방송을 아랑곳하지 않고 쇼핑에 빠져 있는 게 분명했다. 이야기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어서 그 멍청이가 제자리를 찾아가기를 바랐다. 그러다가 무심코 이마 위의 전광판을 보자 낯선 지명, 엉뚱한 항공편 번호와 함께 25라는 게이트 번호가 반짝이고 있었다. 내 여권에 적힌 영문 이름은 ‘Sung Sukje’였다.

태어나서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서 52번 게이트로 찾아갔으나 비행기가 이미 활주로에 들어섰다고 추가 비용을 물고 다음날 비행기를 타라고 하는 것이었다. 레이크플래시드의 그 집 같은 곳은 아직 구하지 못했다. 내 이름의 영문 표기는 한 번만 듣고도 알아듣도록 즉각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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