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2 19:47
수정 : 2014.04.03 09:53
|
김흥국과 박미선.
|
[매거진 esc] 김훈종의 라디오 스타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서 엘사는 모든 걸 얼음으로 만들었지만, 여기 모든 걸 어록으로 만드는 남자가 있다. ‘어록 왕국’의 왕자, 그의 이름은 김흥국. 유시엘에이(UCLA)는 ‘우크라 대학’으로, 터보의 ‘사이버 러버’(Cyber Lover)는 씨버러버로, 차중락의 ‘철없는 아내’는 순식간에 ‘털 없는 아내’로 바꿔버리는 마성의 소유자.
그리고 위기의 엘사를 구해낸 안나 같은 여자가 있다. 사별했다는 청취자의 말에 ‘그럼 이혼한 이유가 성격 차이였냐’고 묻는 김흥국씨의 질문을 부드럽게 수습하는 지혜로운 여자. 늘 흥분하며 들이대는 김흥국을 제자리로 다시 돌려놓는 박미선.
두 디제이와 함께했던 ‘대한민국 특급쇼’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는 프로그램 담당한 지 불과 석달 만에 그 유명한 김흥국 어록을 실제 생방송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실로 진땀나던 그 순간은 한 청취자와의 전화 통화로 시작된다. 청취자가 샴쌍둥이를 낳았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자, 김흥국씨가 “그럼 분리수술은 해주셨나요?”라고 말한다는 것이 그만 “분리수거 해주었나요?”란 망발을 내뱉었다. 사색이 된 나는 토크백 마이크(출연자가 제작진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장치)로 “분리수술! 분리수술!”을 외쳐댔고 다행히 박미선씨가 매끄럽게 수습을 해주었지만 아직도 분리수거 하는 날이면 그때 흘린 진땀이 떠오른다.
2년간 함께 방송을 만들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꽃 쏘고 닭 쏘고’라는 코너였다.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누군가에게 방송을 통해 마음을 전하면 제작진이 꽃과 치킨을 보내주는 구성인데, 하루는 지긋한 연세의 남성 청취자가 신청을 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딸과 의절한 지 어언 5년이 다 되어가는데, 우연히 딸의 출산 소식을 전해 들었다며 축하해주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전해왔다.
아버지에게 건네받은 전화번호로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의 마음과 방송의 취지를 간곡히 전했다. 그럼에도 그간의 섭섭한 마음이 워낙 컸던 딸은 아버지와의 통화를 거절했다. 다만 생방송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읽어주는 건 듣겠다는 약속은 받아냈다. 가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아버지의 회한이 김흥국씨의 어눌하지만 진솔한 목소리로 전달되었다. 다시 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이미 울먹이고 있던 그녀는 전화 연결을 허락해줬다.
서로 그간 쌓인 얘기 좀 나눠보라고 권해도 부녀는 흐느낌만 토해냈다. 배경음악으로 깔린 앙드레 가뇽의 ‘꿈꾸는 사랑’(L’amour Reve)만 계속 흘러나왔다. 하지만 제작진 모두는 아니, 청취자 모두는 침묵 속에서 두 부녀가 교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생방송을 마치고 다시 전화를 하자 딸은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했지만 나도 자식을 낳아보니 깨달음이 왔다”고 했다. 아버지의 인생이 아무리 싫고 원망스러워도, 아버지의 인생으로 오롯이 인정해 줘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김흥국·박미선이란 더블디제이 조합은 참 특이했다. 가수와 개그우먼, 법사와 집사, 기러기 아빠와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의 맏며느리, 막걸리와 카페라테. 달라도 너무 달랐던 두 디제이. 취향도 좋아하는 음식도 종사하는 원래 분야도 다른 두 사람이 더블디제이로 한목소리를 냈다. 서로의 다름을 쿨하게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 디제이가 함께 신청할 만한 노래가 있다면 이 노래 아닐까. “렛잇고, 렛잇고~”(그냥 이대로 둬, 그냥 내버려둬)
김훈종 SBS 라디오 피디
사진 에스비에스 제공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