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9 20:00
수정 : 2014.04.12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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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주제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이색 축제가 한창이다. 지난 4월5일 열린 베개싸움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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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작은 축제’ 열풍
화려한 무대도 없다. 유명한 가수도 등장하지 않는다. 보이는 건 베개나 알록달록한 색가루뿐인데 관객들은 열광한다.
자리에 앉아서 박수치는 축제는 이제 재미없다. 화려하지 않아도 내가 주인공이 되어 달릴 수 있는 작은 축제들, 지금 뜨겁다.
베개를 들고 축제에 갔다. 지난 4월5일 서울 신촌 창천공원에서 열린 ‘2014년 서울 베개싸움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대낮에 베개를 들고 공원에 모인 사람들의 복장이 희한했다. 도널드 덕이나 뽀로로 캐릭터가 그려진 담요를 망토처럼 두른 사람들, 분홍색 수면바지나 흰색 가운을 걸친 사람들이 ‘넌 지금 베개에 끌린다’고 쓰인 벤치에 앉아 다리를 까딱거리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헬멧을 쓰고 전투태세를 갖춘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싸워도 좋다는 신호를 기다릴 동안 공원 한편에서는 서울종합예술학교 개그시트콤 전공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축제 분위기를 돋웠다.
오후 3시,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참가자 100여명이 하늘 높이 베개를 치켜들었다. 싸움이 시작됐다. 베개싸움의 룰은 간단했다. 낯선 사람의 뒤통수를 베개로 조심스럽게 건드려봤다. 그러면 상대는 반드시 더 세게 돌려준다. 뉴질랜드에서 왔다는 제이 브랜들리씨는 금세 머리까지 빨개졌다. 신촌에 숙소를 두고 있다는 그는 베개싸움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급한 김에 작은 방석을 들고 출전했다가 화력 부족으로 수모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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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5일 열린 베개싸움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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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베개싸움은 단 15분. 1라운드가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 참가자들은 베개를 베고 공원에 드러누워 버렸다. 베개싸움 축제 구성은 단순했다. 사이렌이 울리면 서로 가격하고 다시 사이렌이 울리면 멈춘다. 눈을 뜰 수 없는 난타전이 벌어질 동안 공원에는 클럽풍 일렉트로닉 음악이 빠른 속도로 울려 퍼지며 싸움을 격려했다. 쉬는 시간에는 평화롭고 단순한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두 시간 동안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이 작은 행사를 축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알고 보니 이날은 세계베개싸움의 날이란다. 영국의 런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등 세계 100여곳에서 사람들이 동시에 베개를 든 날이다. 같은 날 한국에서도 서울, 대전, 울산에서 베개싸움 축제가 열렸다. ‘세계베개싸움의 날’ 공식 누리집(홈페이지)에서는 ‘20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한 이 축제는 소극적이거나 소비적인 놀이에서 벗어나서 도시 공공 공간을 놀이터로 만들자는 뜻의 행사’라고 밝히고 있다. 파자마 차림으로 전투에 앞장섰던 양명진(26)씨는 ‘플레이그라운드 스피릿’(http://cafe.naver.com/playgroundspirit)이라는 동호회 회원 10명과 함께 축제에 왔다. 같은 동호회원인 초등학교 교사 최윤미(28)씨는 베개가 날아오면 방패로 쓸 요량으로 귀여운 곰돌이 팔베개를 차고 왔다. 최씨는 “운동이나 레저는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축제는 여럿이 뜻이 맞아야만 가능하다. 이런 자리에서 얻은 놀이 아이디어를 학교에서도 간혹 써먹는다”고 했다. 이들 동호회원은 피에로 복장에 특수 제작한 베개까지 들고 왔다. 놀이에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이들, 물총축제·이색마라톤·좀비퍼레이드 어디든 가서 이벤트를 축제로 만들어버리는 놀이 세대들 사이에서 작은 축제가 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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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한국에 처음 들어온 색깔있는 달리기 컬러 미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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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13년 한국에 처음 들어온 색깔있는 달리기 컬러 미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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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축제의 트렌드는 단연 색깔이다. 지난해 컬러 미 래드와 컬러런이 한국에서도 처음 열린 데 이어 ‘달릴 필요도 없다. 색깔있는 가루를 맞으며 걷자’는 걷기 축제도 나왔다. 신발업체 크록스에서 여는 ‘컬러 펀 워킹’은 4월27일 알록달록한 색의 가루를 맞으며 양재 시민의 숲 주변 5㎞ 길을 걷고 장미여관, 이다희 등의 공연을 보며 함께 논다. 5월17일 과천 서울랜드에서 열리는 ‘라이프 인 컬러 코리아’는 형형색색 가루와 페인트를 뒤집어쓰며 공연을 보고 함께 춤추는 색깔있는 음악 페스티벌이다. 지금 시작되는 작은 축제들 대부분이 그렇듯 ‘라이프 인 컬러 코리아’도 미국의 한 대학에서 시작해 세계로 번져가고 있다는 점과 출연진보다는 퍼포먼스, 무대보다는 객석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내세우고 있다.
문화기획집단 차차차 이지은 실장은 “1999년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이 처음 열릴 때만 해도 한국에는 ‘난장을 깐다’고 할 수 있는 자리가 별로 없었다. 상업화·거대화된 축제 시장이 극정점에 달한 지금 사람들은 독특한 콘셉트 축제를 찾게 된다. 게다가 외국에 있는 문화가 우리나라에도 온다는 말이 축제 소비자들의 구매욕을 자극하는 탓에 독특한 외국 페스티벌을 잘 포장해서 들여오는 게 트렌드가 됐다”고 했다.
짝짓기도 젊은 축제의 필수 요소다. 베개싸움 축제에선 마음에 드는 베개 주인을 발견하면 이벤트 부스로 와서 카카오톡 아이디를 물어보라고 권한다. 2013년부터 청춘남녀 거리 짝짓기를 시작했던 ‘새마을 미팅 프로젝트’는 올해 4월12일 소셜 축제를 표방하며 덩치를 키웠다. 4월12일 700명의 남녀가 신촌 거리에서 만날 동안 여일밴드, 낭만유랑악단, 모리쉬, 머스타드멜로우 등 인디뮤지션들이 길거리 공연을 펼친다. 아예 “달리면서 인연을 만나라”고 부추기는 달리기 축제도 열린다. 4월26일 오후 1시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열리는 싱글런은 만 19살 이상 솔로 5000명을 모아 함께 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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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미팅과 공연을 결합한 새마을 미팅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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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싸움 축제가 막바지를 향해 갈수록 쉬는 시간엔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는 인원수가 늘어갔다. 이날의 주제가는 ‘호키포키’. 흐트러진 머리와 속 터진 베개를 들고 참가자들은 “다 같이 오른손을 안에 넣고”라는 노랫말에 맞춰 어린아이처럼 흔들었다. 난생처음 만나 베개를 섞고 나니 갑자기 친해진 모양새다. 베개싸움 축제를 주관한 한국소셜페스티벌협회 민신홍(25) 회장은 “그동안 우리나라에선 참가자들을 관객이나 소비자쯤으로만 여겼다. 베개싸움 축제는 다른 사람을 건드리고 접촉하는 축제”라고 했다. 한국소셜페스티벌협회는 대학생과 직장인 35명이 함께 만드는 비영리 축제 기획집단이다. 올해는 베개싸움 축제 말고도 서울 치맥 페스티벌(7월), 성균관대 유생 퍼레이드 등 일상의 장면에서 한발짝 벗어나는 작고 다양한 축제를 열 예정이라고 했다.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indienbob.tistory.com)을 만드는 정진세씨는 이런 작은 축제들을 ‘유사 축제’라고 부른다. “기획 축제들은 다양성, 자발성을 이야기하면서 실은 그것들을 관리하려고 한다. 알고 보면 다양하지도 않다. 대한민국에서 축제 하려면 돈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그런 흐름을 벗어나보고 싶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의논하고 즉시 실행에 옮기는 경향이다. 자기들의 움직임을 축제로 만드는즉흥축제들은 굉장히 작고 미미하지만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재미있게 한다.” 정씨도 지난 2월 아오병잉(아시아·오프·병맛·잉여 페스티벌)이라는 독특한 축제를 열었는데 뜻밖에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2주 전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청년들이 모여서 ‘주성치 영화제’라는 작은 축제를 열었던 것처럼 지금도 에스엔에스에서는 축제 궁리가 끊이지 않는다. 문화적으로 성숙한 수요들이 만들어가는 파티, 다양성과 자발성이 몸부림치는 자리, 축제는 계속되어야 한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조소영 <한겨레티브이> 피디
azuri@hani.co.kr
새마을미팅프로젝트, 인디언밥, 청춘페스티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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