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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 뒷산(성인봉)에서 내려다본 서화천과 부소담악. 미세먼지로 시야가 다소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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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여행
연초록 봄 기운 용틀임하는 충북 옥천 고리산과 서화천 부소담악 여행
산벚꽃·들벚꽃 꽃눈 흩뿌리며 잦아드는 때. 산과 들은 이제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번져가는 연초록 새순들 세상이다. 이 초록 세상을 부드럽게 감싸고 굽이치며 ‘비단강’(금강·錦江)도 흐른다. 용틀임하며 흐르는 물길로 이름난 금강. 금강의 상류 물줄기 중 하나가 충북 옥천 읍내 서쪽의 ‘꽃다운 강’ 서화천(西華川·소옥천)이다. 충남 금산 땅에서 발원해, 옥천 서북쪽 지역의 산봉들을 이른바 ‘궁궁을을’(弓弓乙乙)의 형세로, ‘에스(S) 라인’의 자태로 마음껏 휘돌아 감다가 금강 본류(대청호)로 몸을 들이미는 물길이다.
인터넷 지도 검색을 해보면, 서화천 하류의 모습은 영락없이 ‘활 궁’(弓)과 ‘새 을’(乙) 자의 연속이다. 비록 조선시대 예언서의 ‘십승지’(난을 피해 살 수 있는 곳들. 이른바 ‘궁궁을을지간’)는 아니어도, 경치에 감탄한 우암 송시열은 이 물길을 경애천(驚崖川)이라 부르고, 소금강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굽이쳐 흐르는 서화천 하류의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이 고리산(환산·581m)이다. 고리산에 올라 서화천 물길을 감상하고 내려와 물가에 새겨진 선인들 발자취를 둘러보고 왔다.
의병장 조헌 서화천 물가에
정자 짓고 후학 가르치던 곳
조헌 흠모한 송시열도 찾으며
너럭바위에서 술잔 기울여
백제·신라 격전지 고리산, 전망 탁월
고리산은 충북 옥천군 군북면, 서화천 하류 서쪽에 솟은 ‘국내 100대 명산’에 드는 전망 좋은 산이다. 나제동맹이 깨진 뒤, 백제·신라군이 격전을 치르던 곳이었다. 서화천 물길을 사이에 두고 봉우리마다 보루와 산성을 쌓고 전투를 벌이다 백제군이 크게 패한 곳이라 전해온다. 백제 성왕 때다. 고리산성·식장산성 일대엔 말과 군사의 주검을 묻었다는 말무덤재, 신라 공주의 태를 묻었다는 태봉 등 옛 지명들이 남아 있다.
고리산(환산)이란 이름도 백제 때 지명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옥천 향토전시관 전순표(59) 관장은 “고리산은 옥천의 백제 때 지명인 ‘고시산군’에서 비롯한 이름인데, 이걸 다시 한자로 적으며 ‘고리’를 뜻하는 환산이 됐다”며 “고리산 남쪽의 고무시(환평)마을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고리산 산행 코스는 8개다. 대개 단체로 온 산꾼들은 이백리 황골에서 올라 정상 거쳐 추소리로 내려오는 7㎞ 거리의 종주 코스(4시간 소요)를 탄다. 하지만 하산 뒤 출발점까지의 이동 불편으로, 개별 산행객들은 주로 추소리~정상~추소리(왕복 4.4㎞·3시간 소요)의 왕복 코스를 이용한다. 매우 가팔라 밧줄을 잡고 오르는 구간이 많지만, 집중적으로 땀을 뺀 뒤 광활한 산세와 굽이치는 물줄기를 감상하는 맛이 좋다.
산은 가팔라도 온통 연초록 새순으로 우거져가는 눈부신 산길이다. 산벚꽃·진달래 꽃빛의 막바지 여운과 가끔씩 발치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야생화들의 자태도 즐길 만하다.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서화천 물길을 배경으로 ‘푸드등 꿩꿩’ 하며 날아오르는 꿩들이며, ‘따그르르르’ 골골이 울리는 딱따구리의 강력하고도 청아한 진동음이 모두 발길에 힘을 실어준다.
정상 가까이 세워진 이정표는 믿을 게 못 된다. 능선에 올라서서 잠깐 바윗길을 타고 가다 만나는 가장 높은 지점이 정상이고, 잠시 뒤 나오는 널찍한 터가 고리산 제3봉인데, 여기서의 전망이 빼어나다. 옛 고리산성 석축 일부가 남아 있는 곳이다. 동쪽으로는 서화천이 감아돌아 흐르는 추소리마을과 그 너머로 첩첩이 쌓인 옥천 북부 지역 산줄기들이 펼쳐져 있고, 북쪽으론 멀리 대청호 일부가 눈에 잡힌다. 굽이쳐도 좀 심하게 굽이쳐 흐른다 싶은 서화천 물길과, 길어도 좀 심하게 길고 가늘다 싶은 절벽지형 ‘부소담악’의 자태가 도드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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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소리 부소담악 산책로 들머리에서 꽃눈을 맞았다. 벚꽃잎들이 떨어져 분홍색 꽃을 피운 복숭아나무 쪽으로 흩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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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천 물길이 빚은 700m 병풍바위 부소담악
부소담악은 서화천 물돌이 지형이 물길에 깎여 형성된 700m 길이의, 위태롭도록 가느다란 반도형 암벽이다. 강 안쪽 깊숙이 들이민 악어 주둥이 같기도 하고, 강물을 막기 위해 설치한 구조물 같기도 하다.
하산해 추소리 서낭재에서 부소담악 능선길을 따라 걸었다. 전망대 겸 정자인 추소정과 부소정을 거쳐 주둥이 끝부분 가까이까지 산책로가 나 있다. 일부 구간은 폭이 10여m에 불과해 능선길에서 양쪽 물길에서 노니는 팔뚝만한 물고기들을 동시에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다.
부소담악 산책로 들머리가 느티나무 성황목이 있는 서낭재(서낭댕이)이다. 대청댐이 생기기 전, 이 고개를 사이에 두고 왼쪽 물가엔 34가구가 살던 추동마을이, 오른쪽 물가로는 32가구가 살던 부소머니마을이 있었다. 대청호가 만들어지며 두 마을은 수몰되고 주민들은 위쪽으로 마을을 옮겼다. 마을 이름도 추동과 부소머니에서 한 자씩 따와 추소리로 바꿨다.
추소리 이장을 15년간 맡고 있는 박찬훈(60)씨는 “부소담악이 옛날부터 저 모습이었다거나, 그 이름이 연화부수형의 지형에서 나왔다는 등의 얘기는 최근 갖다붙인 얘기”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가느다란 절벽 모습이지만,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절벽 대부분이 참나무·소나무로 덮여 있었고, 경사가 완만해 아래쪽엔 밭들도 있었다”며 “물에 잠기고 물살에 깎이면서 바위절벽이 드러나게 됐다”고 설명했다.
부소머니란 이름도 유서 깊다. 부소머니마을 출신 향토사학자 류제구(80)씨는 “‘부소’라는 건 백제 때 부여의 부소산에서 가져온 이름”이라며 “부소머리, 부소모렝이(모퉁이) 등에서 변화된 지명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길게 이어진 부소담악 경관을, 고리산 정상까지 오르지 않고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추소리 뒷산 성인봉 중턱이다. 20여분간 이정표도 없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전망이 나온다. 가을이면 물안개 피어오르는 서화천 풍경을 찍으려는 사진가들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서낭재에서 황룡사 쪽으로 찻길을 내려가다 왼쪽 밭길로 들면 무덤가에 산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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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이 후학을 가르치던 서화천변의 이지당(옛 각신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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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조헌과 송시열 자취 서린 이지당
서화천 물돌이 경관은 수백년 전에도 장관이었던 모양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인 중봉 조헌(1544~1592)은 서화천 각신마을 건너편 물가에 정자(각신서당)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는 한편, 서화천의 아홉 경치를 시로 읊었다(율원구곡). 아홉 경치 중 제3곡이 임정(서정자·옥천읍 서쪽 서화천변에 있던 정자로 현재 서정리에 복원돼 있다)이고, 제4곡이 부소담악, 제8곡이 환산(고리산)이다. 조헌은 평생 직언으로 일관한 강직한 충신이자,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의병장이었다.(금산 ‘칠백의총’ 참조)
조헌 사후 15년 뒤 옥천에서 태어난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조헌을 흠모해 서화천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는, 흠모의 뜻을 담아 ‘이지당’이란 현판을 써 서당에 걸었다. 이지당 옆 나무데크길 위쪽 바위벽에도 조헌이 머물던 곳임을 밝히는 내용의 글이 있다. 우암의 글을 후학들이 새긴 것이다. 조헌도, 그를 흠모한 송시열도 이곳에 머물 때면 물가 너럭바위에 앉아 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저기 물가에 시꺼먼 바우 있잖여.” 이지당마을(마을 이름도 이지당이다)에서 4대째 살고 있다는 권대웅(74)씨가, 밭에 앉아 호박씨를 심다가 일어나 이지당 앞 강변을 가리켰다. “거기가 방바위여. 조 선생이나 송 대감이나, 다 방바위에서 술을 자셨디야. 이건 실지 상황이여. 그러면 동네 아낙들이 불 피워설랑 안주로 전을 부쳐드렸디야. 전설이 아니여. 실지여.”
이지당 건물이 매우 아름답다. 1901년 금·이·조·안씨 4문중에서, 양쪽에 누마루를 올린 정면 7칸, 측면 1칸으로 새로 지은 것이라 한다. 이지당을 보고 돌아나오는데, 서화천 물소리도 산기슭 새소리도 또랑또랑한 것이, 서당 아이들 글 읽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옥천/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 옥천 여행정보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옥천나들목에서 나가면 바로 옥천읍내다. 나오자마자 정지용 생가(구읍) 쪽으로 좌회전한 뒤 고속도로 밑 지나 옥천상고사거리에서 좌회전, 우시장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한 뒤 삼양사거리에서 우회전해 군북면소재지까지 직진한다. 이백삼거리에서 우회전해 비좁은 굴다리(교행 때 조심) 지나 우회전해 굽이 심한 산길로 직진하면 추소리다.
먹을 곳 옥천 구읍(옛 읍내) 쪽에 어탕국수·도리뱅뱅이·도토리묵밥 등을 내는 괜찮은 식당이 많다. 구읍의 대박집 어탕국수(사진 위)·어탕국밥·도리뱅뱅이, 옥천묵집 도토리묵밥(아래)·도토리칼국수·도토리수제비, 구읍할매묵집 도토리묵(냉·온)과 메밀묵(겨울), 마당넓은집의 새싹비빔밥·황태전골 등, 삼양사거리 금강올갱이의 올갱이(다슬기)해장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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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 먹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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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 먹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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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을 곳 옥천 구읍의 260년 된 한옥 춘추민속관(2인1실 6만원), 우시장삼거리의 명가 모텔(평일 4만원부터) 등.
주변 볼거리 옥천 구읍은 식당·정미소·가게·미용실 등이 온통 정지용 시로 장식된 곳이다. 정지용 생가, 옥주 사마소(생원·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던 곳), 옥천향교가 있다. 오래된 한옥들과 느티나무 고목, 불망비 무리, 최근 대규모로 복원된 육영수 생가도 있다.
여행 문의 옥천군청 문화관광과 (043)730-3412, 옥천문화원 (043)733-5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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