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30 19:37
수정 : 2014.05.0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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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에 실린 방산시장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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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라이프
목공·인쇄·포장 전문 가게 모여있는 방산시장…셀프 인테리어·요리 관심 늘면서 일반인들 발길 늘어
4000개 넘는 작은 가게들
소비자 중심 시장들과 달리 성장
다른 전통시장들 뒤처지는 동안
시대에 맞춰 재빠르게 변신
알고보면 ‘꽃향기가 풍기는 산’이라는 낭만적 이름이지만 어쩐지 쉽게 발길이 닿지 않았다. 서울 중구 을지로에 있는 방산시장은 날마다 찾게 되는 시장은 아니지만 도배, 제과·제빵, 인쇄 같은 일 때문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열심히 뒤지게 되는 시장이다. 5월 말 방산시장 투어와 지도를 준비하고 있는 아마추어서울과 함께 4월25일 찾아가보았다.
서울 을지로4가 지하철역에서 나와 ‘방산종합시장’이라고 쓰인 아치 모양의 문을 들어서면 방산시장의 중심 거리가 시작된다. 한낮 방산시장은 손님을 부르는 소리도, 가격을 흥정하는 소리도 없이 조용했다. 큰 짐을 든 지게차와 상자를 잔뜩 실은 삼발이만 큰길을 바삐 오간다. 오토바이 뒤에 수레를 매단 삼발이는 방산시장만의 운송수단이라고 했다. 차가 들어가기 어려운 좁은 골목을 누비며 이 가게와 저 가게를 연결하는 일을 한다. 장바구니보다는 수첩을 챙겨가게 되는 시장, 소비보다는 생산을 위한 시장. 이곳은 물건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이 주인인 시장이다. 4명의 디자이너가 모여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며 서울 곳곳의 안내지도를 만들어온 아마추어서울이 지난 3월부터 방산시장 조사를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추어서울은 지금까지 서울 종로구 원서동·익선동·서대문 등의 지도를 만들고,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의 속내를 나누는 투어를 열어왔다. 방산시장 지도 발행을 위해 소셜펀딩 사이트 텀블벅(https://tumblbug.com/ko/amateurseoul5)에서 후원을 받고 있다. “시장이라는 말은 소비가 이루어지는 공간을 한정하곤 하는데 방산시장은 이와는 조금 다른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이 방산시장을 택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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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시장의 주요 운송수단인 삼발이와 자전거가 시장을 오가며 가게들에 일감을 주고 물건을 받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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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시장 여행은 맞은편 중부시장과 접한 길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방산시장 바로 건너편 목공거리는 중부시장에 속해 있지만 방산시장을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인테리어 업체들이 주로 찾는 골목이지만 제 손으로 가구를 만드는 사람들이 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고 했다. “아, 동네 목공소와 비교하면 기분 나쁘지. 여기 사람들은 수십년 동안 나무만 만져온 사람들인데. 이케아처럼 열도장된 빤질빤질한 가구는 못 만들지는 몰라도 나무로 만드는 거라면 뭐든 생각해서 창조하는 게 우리 업이지.” 금강인테리어라는 목공소에서 일하던 직원이 퉁명스럽게 말한다. 직접 가구를 만들거나 나무 작품을 제작하는 사람들이 옆집 한성목재소에서 나무를 고르면 이곳 목공소에서 바로 만들 수 있다.
중심 거리에서 오른쪽 좁은 길로 들어서면 포장 상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작은 가게들이 빼곡하다. 한 가게에서 종이를 택하고 어떻게 만들면 좋겠느냐고 물으면 스티커든, 포장 상자든, 인쇄물이든 맞춤한 가게를 소개해준다. 방산시장 오른쪽 좁은 골목에 있는 가게들은 분업으로 연결된 벌집 같은 생태계를 갖추고 있었다. 아마추어서울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김지은씨는 “방산시장에서는 흥정이 필요 없다. 가격 경쟁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믿을 만한 가게를 한곳 택한 뒤 다른 가게 소개를 받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했다. ‘각종 박스 제작’이라는 간판을 내건 부일지공도 아는 사람이 소개하지 않으면 찾아가기 어려울 법한 작은 골목에 있었다. 부일지공 강용선 대표는 “예전에는 장사가 잘돼서 직원만 6~7명이었는데, 지금은 큰 업체는 다 파주나 김포로 빠져나가고 동생과 둘이서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나만의 상자, 맞춤형 포장을 찾는 작은 주문들이 방산시장으로 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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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게 없는 페인트 가게, 명찰 가게들의 진열장도 이 시장의 구경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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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게 방산시장을 지켜온 용문지류 김승수 대표의 기억에 따르면 1960년대 방산시장은 생필품 위주인 광장과 중부시장 틈새에서 미군부대에서 나온 설탕이나 음식 부자재들을 파는 작은 좌판들이 모여 형성되었다. 분당 신도시가 지어질 무렵 벽지 가게들이 불티나게 잘됐고, 도심개발과 함께 인쇄업을 키워왔다. “방산시장엔 3인 미만이 일하는 가게가 절반을 넘는다. 틈새시장답게 시류를 재빨리 익히며 발전해 왔고 개발이 안 된 덕에 건재하다”고 김 대표는 말한다. 한때 ‘탱크도 만들 곳’이라며 위용을 떨쳤던 세운상가는 쇠락했지만 방산시장 왼편 철공거리는 아직도 없는 것 없는 철물들의 집합소다. 화려한 인쇄물을 찍어내는 충무로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흑백 인쇄물이나 싼값에 다량 팔려나가는 산업 인쇄물들을 찍는 방산시장 수백개 작은 가게들에선 수십년 경력의 기술자들이 일상을 챙긴다.
방산시장 중심 거리 왼편에는 스티커나 라벨, 작은 명찰들을 제작하는 업체들이 숨어 있었다. 요즘 이 골목엔 유명 전자회사의 보안카드부터 농촌회 표지판까지 걸어둔 가게 진열장 사진을 찍어가는 외국인 여행자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방산시장의 가장 큰 변화는 방산시장에서 종로 쪽으로 빠져나가는 골목에 들어선 제과·제빵, 포장가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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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과·제빵 재료부터 포장지까지 방대한 물건을 자랑하는 가게 청명앤드청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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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들을 포장합니다” 가게에서 내건 간판처럼 연필 한자루부터 큰 곰인형까지 쌀 수 있는 포장재료들이 가득한 가게들과 초콜릿, 쿠키를 만드는 자재와 도구를 파는 가게들이 새롭게 붐비는 골목을 형성하고 있다.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오면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진다. ‘무엇이든 한자리에서’라는 방산시장 법도대로 카카오 파우더 같은 기본적 재료부터 상자까지 모두 사갈 수 있도록 업종이 조금씩 다른 작은 가게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아마추어서울 유혜인씨는 “4000개 넘는 작은 가게들이 모인 방산시장은 가게 하나하나는 정말 작지만 다른 전통시장들이 시대에 뒤처질 동안 오히려 시대에 맞춰 재빨리 변신해온 단단한 시장”이라고 했다.
시장을 한바퀴 돌아 비누 몰드와 쿠키틀 한가지씩만 샀다. 방산시장에선 무언가를 선뜻 사기는 어렵다. 시장 구경의 소비적 즐거움을 누리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무언가를 만들 결심이 섰을 때 찾는 곳, 그곳이 방산시장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지도 자료 아마추어서울
>>> 이곳만은 꼭 들러보세요
블로거 후기보다 상인들의 ‘소개’가 믿을 만한 방산시장에서 상인들과 아마추어서울이 추천하는 방산시장 명소들.
청명앤드청솔 10년 전쯤 처음 생긴 이 가게는 얼마 전 중심 거리에 건물을 새로 짓고 2층에 카페를 열었다. 지하 1층부터 2층까지 제과·제빵·초콜릿 재료와 포장재료와 용기, 봉투 등 8000개쯤 되는 제품을 전시해두었다. 요즘은 양초 만들기가 대세라 캔들 재료가 잘 팔린단다. 비닐 포장 일번지인 방산시장답게 비닐 포장지는 언제나 많이 팔리는 제품.
삼호일식 방산시장을 둘러 소문난 맛집도 많지만 시장 상인들은 방산종합시장 건물 근처에 있는 작은 식당들을 많이 들른다. 값도 싸고 크게 붐비지 않는다. 삼호일식은 ‘개미식당’이라는 옆 식당 간판처럼 입구는 작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뜻밖에 넓은 곳이다. 1만원에서 1만5000원 정도의 값에 회덮밥, 매운탕 같은 음식이 알차다.
벽지 골목 요즘은 직접 방산시장을 찾아 벽지를 고르고 일할 사람을 찾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하면 보통 20~30% 정도 도배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장점. 방산시장 도배 골목이 여느 전문상가와 다른 점은 가게마다 가격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상인회에서 추천하는 곳은 오랫동안 영업을 해온 금강벽지.
성제묘 방산시장 안에는 사당이 숨어 있다. 종로 지하상가 쪽 작은 골목에 있는 자줏빛 신당 문은 보통 때는 굳게 잠겨 있다가 해마다 10월 방산시장 상조회가 제사를 모실 때만 열린다. 임진왜란 때 관우 장군신의 도움으로 왜구를 물리쳤다고 믿은 명나라 장수가 세운 성제묘를 품고 있는 신당이다. 사당에 들르고 싶다면 미리 상조회에 부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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