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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5.07 19:38 수정 : 2014.05.07 19:38

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

[매거진 esc] 성석제의 사이(間) 이야기
히타이트 문명 유적지 터키 보가즈쾨이에서 만난 ‘친한파’ 동네 아저씨

2010년 여름, 철기문명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터키의 수도 앙카라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철기문명을 향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였던 보가즈쾨이(보아즈칼레)를 찾았다. 앙카라를 빠져나오자 곧바로 메마른 황토지대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햇빛 또한 그지없이 따갑고 공기는 건조했다. 그럼에도 이따금 해바라기를 기르는 커다란 밭이 나타났고 추수를 끝낸 지 오래지 않은 듯한 밀밭도 보였다.

“터키는 유럽의 식량창고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농사를 많이 지어요. 강수량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강을 통해서 물이 공급되거든요.”

통역과 안내, 운전을 맡은 잘생긴 청년 K가 설명했다.

기원전 17세기 후반, 히타이트의 정복군주 하투실리스 왕은 보가즈쾨이를 통일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이름은 하투샤로 정해졌다. 하투샤는 해발 1000m의 고원, 기복이 심한 비탈면에 자리하고 있다. 동서 길이 약 1.3㎞, 남북 길이 약 2.1㎞이고 약 8㎞의 이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것으로 보아 남의 나라를 정복해본 군주의 입장에서 거꾸로 남한테 공격을 당할 때를 충분히 대비한 것이지 싶다.


한국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한국 휴대전화 업체 이름과
터키 공장 있는 자동차 업체
이름을 외치더니
껴안을 듯 가까이 다가왔다

역대 히타이트 왕들은 전쟁과 정복에 뛰어난 군주들이었다. 히타이트인들은 용맹한 전사로 유명했고 다른 나라에는 없는 강하고 날카로운 철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거기다 강력한 바퀴를 두 개만 장착한 전차를 앞세운 새로운 전술을 구사했다.

기원전 13세기 후반에 무와탈리스 왕은 시리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오론테스 강변에 있는 카데시에서 결전을 벌였다. 결과는 무승부였지만 시리아는 여전히 히타이트의 통치를 받았다. 뒤를 이은 하투실리스 3세는 이집트와 우호조약을 맺고 딸을 람세스 2세에게 출가시켰는데 이 무렵부터 히타이트는 급속도로 힘을 잃었고 100년쯤 지나서 서방에서 침입해온 민족에 의하여 갑자기 붕괴했다.

3300년 전 제국의 수도였던 하투샤는 황막했다. 무너진 궁성과 성채, 신전에서 나온 바윗돌이 흩어져 있었고 풀만 수북하게 자라 있었다. 덤불 사이로 양들이 돌아다녔다. 풍경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관광객이 좋아할 만한 건 별로 없었다.

성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매표소 비슷한 건물이 있었고 차량차단기 비슷한 것도 있었다. 차를 세우자 건물 그늘에서 시커멓게 수염을 기른, 아니 깎지 않아서 더부룩하게 자라난 것 같은 수염을 한 남자가 통통한 팔을 번쩍 쳐들고 정지신호를 보냈다. 이미 정지를 했는데도.

“어떻게 오셨습니까?”

매표소 관리인인지, 경찰인지, 관광청 소속 공무원인지 정체를 모를 묘한 질문이었다. 어쨌든 K가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유적을 촬영하러 온 제작팀이라고 우리를 소개했다. 남자는 한국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한국 휴대전화 제조업체 두 군데의 이름과 터키에 공장이 있는 자동차회사 이름을 외치더니 두 팔을 벌리고 껴안을 듯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K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그는 동네 주민이었다. 우리나라 작은 면 규모인 인구 2000명도 되지 않는 보가즈쾨이 차기 읍장 선거에 출마 예정인. 그는 관광 가이드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외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에서 부인과 남편을 칭하는 단어를 알고 있었고 때로는 ‘맘마 미아’ 같은 단어를 감탄사로 썼다. 결국 그는 자청해서 우리의 안내를 맡았다.

기원전 13세기 무렵의 상황을 재연하는 장면을 촬영했고 거기에는 적당한 장소와 가축,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주었으며 그들에게 즉석에서 연기 지도를 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는 허풍이 심하지만 악의 없는 인물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노인과 아이들을 곧잘 웃겼다. 말보다는 과장된 표정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연상케 하는 행동으로.

일과가 끝나면 그는 우리가 묵고 있는 보가즈쾨이에 하나밖에 없는 호텔로 따라와서 같이 저녁을 먹고 가곤 했다. 내가 그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어야 했다. 그는 내가 언어를 가지고 밥을 벌어먹는 소설가라고 하자 영어도 잘하는 사람으로 믿고는 내게 자꾸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내가 오해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다. 터키는 한국전에 참전했고 2002 한일 월드컵 때 3위를 차지할 때 한국과 경기를 했다. 터키 사람들이 세계에서 제일 좋아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한국과 터키가 형제이듯 당신과 나 또한 형제지간이다.”

하도 반복해서 같은 말을 하기에 나는 그에게 몇 살이냐고 영어로 물어주었다. 서른셋이라고 했다.

“우리는 형제가 아니다. 한국에는 ‘객지 벗 십 년’이라는 말이 있다. 너는 나에 비해 열 살보다 한참 아래이니 삼촌이라고 불러야 맞다.”

그러나 그는 나를 계속 ‘브라더’라고 불렀고 부른 뒤에는 꼭 껴안으려고 들었다. 그게 그 동네의 관습인지는 모르지만.

그럭저럭 일정이 끝나고 떠나기 전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를 맞이했다. 호텔의 주인은 호호백발 할아버지와 할머니였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대체로 짰는데 나는 그게 주인 할머니가 연세가 들다 보니 입맛이 무뎌져서 소금을 많이 넣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양고기와 닭고기, 채소 샐러드, 치즈를 곁들인 식사를 하고 있는데 며칠 동안 주변을 멀찌감치서 맴돌던 잘생긴 청년이 다가왔다. 호텔 주인의 아들이라는데 자신이 직접 만든 장신구 세트를 사라는 것이었다. 터키석으로 된 목걸이, 팔찌, 반지, 브로치, 귀고리 등속이었다. 물건은 조악했지만 호되게 비쌌다. 우리 돈으로 20만원 정도.

“사도 가져다줄 사람이 없는데? 갖다줘도 할 사람이 없고.”

몇 번을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청년은 탄탄한 근육과 멋진 생김새가 아깝다 싶게 계속 징징거렸다. 그때 ‘브라더’가 터키어로 몇 마디를 묻더니 청년에게서 터키석 자갈더미를 와락 낚아채 내게 건넸다.

“15유로.”

청년은 내 지갑에서 나온 돈을 받아들더니 원망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쏘아보며 뭐라고 외치고는 나가버렸다.

“이래도 되나? 직접 만들었다는데?”

“쟤가 그걸 직접 만들었으면 나는 터키석을, 아니 터키를 창조했어요. 얼마든지 이래도 돼요. 나는 쟤 삼촌이니까.”

“쟤가 몇 살인데 삼촌이래? 서른은 됐겠구먼.”

“쟤 스물다섯이고 우리 형, 여기 호텔 주인이 마흔다섯이에요. 나보다 열두 살 많아요.”

“아니 저 할배가 네 형이야?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데?”

우리끼리의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호텔 주인 양주분들은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헤어질 때 그는 나를 굳세게 껴안고 오른쪽 왼쪽 뺨을 맞대는 인사를 했다. 수염이 따끔거렸다. 불룩 나온 배가 내 배에 맞닿았다. 형제가 맞긴 한가보다. 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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