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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5.14 19:42 수정 : 2014.05.15 21:45

아보리스트들은 두가닥 밧줄에 의지해 20m 넘는 나무 꼭대기로 올라간다. 허리에 10가지 넘는 장비와 로프를 두르고 아보리스트들이 나무 오르기 실습을 하고 있다.

[매거진 esc] 라이프
나무에 올라 나무를 돌보고 합일을 꿈꾸는 수목 관리사, 아보리스트 체험기

매듭 묶어 나무 오르기
도르래 원리로 올라가
등산에서 느끼기 힘든
고요와 평화를 경험

10m 높이에서 두 가닥 줄에 매달려 숲을 내려다보았다. 나를 매달고 있는 1.2㎝ 굵기의 밧줄은 두 나무를 잇는 밧줄에 다시 걸려 있다. 허리에 벨트를 차고 밧줄을 여러 갈래로 돌려 묶은 다음, 손으로 윗밧줄을 당기고 발로 아랫밧줄을 밟으면 몸은 조금씩 공중으로 떠오른다.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여간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 조금씩 높이 올라갈 때마다 아래 세상이 조금씩 멀어지더니 나무와 가까운 이곳은 아예 고요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실은 내려가는 법을 몰라 구조를 기다리는 참이었지만 공중 세계는 이대로 명상에 잠겨도 좋을 만큼 평화로운 곳이었다. 5월6일 강릉시 부연동 깊은 숲속에서 열린 아보리스트(수목 관리사) 교육에서 나무 오르기 체험을 하는 시간이었다.

아보리스트들의 나무 오르기.
아보리스트들의 나무 오르기.
“한번쯤 나무의 품에서 잠들어보라.” 배우 현빈은 한 등산화 광고에서 그렇게 유혹했다. 과연 강사 임상운(37)씨가 밧줄을 타고 구하러 올 때까지 나무 위에서 보낸 10분 남짓한 시간은 깜빡 잠이 들 만큼 한가로웠다. 밧줄 타고 나무 오르기는 번지점프처럼 심장을 흔들어대지도 않으면서 잠시나마 우리를 중력에서 자유롭게 하는 운동이었다. 지난 5일부터 2주일 동안 열린 이 강좌는 아보리스트 중에서도 나무를 타고 올라가 일하는 트리 클라이머 아보리스트의 기술과 지식을 배우는 프로그램이다. 수목관리연구소 ‘나무 위를 걷는 사람들’에서 주최한 이번 교육에는 무등산국립공원 사무소에서 일하는 이기창씨, 경북 김천에서 임업을 하는 강용신씨, 나무병원 의사들 등 나무와 관련된 일을 하는 이들 15명이 모였다. ‘숲밧줄 놀이 연구회’ 회원들, 울산에서 병영자연유치원을 경영하는 이정순씨 등도 아들을 데리고 왔다. 나무 오르는 기술과 경험을 나누어 나무 치료, 위험목 제거뿐 아니라 나무 오르기 놀이까지에도 활용할 생각이다. 외국에서도 아보리스트들의 등반 기술을 적용한 나무 오르기 스포츠가 한창이다.

초보자가 나무에서 내려오자 아보리스트 지망생들이 벨트에 밧줄을 걸면서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됐다. 아보리스트들의 일은 매듭으로 시작해 매듭으로 끝난다. 나무 위에서 자유낙하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이 매듭뿐이다. 20가지는 넘는 아보리스트들의 매듭법은 선원들의 해상결박, 암벽등반가들의 매듭법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아보리스트들의 선생님, 아보마스터 김병모(53)씨는 “매듭이 못생기면 위험하다”며 몇번이고 풀고 다시 묶도록 했다. 김병모씨는 광고연출감독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히말라야까지 오르는 등반꾼이었다. 밧줄 쓰는 법은 자신있었던 그는 2000년 미국 출장길에 한 아보리스트 양성기관을 알게 되어 교육을 받았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숲에서 처음으로 아보리스트라는 사람들을 봤는데 경이로웠어요. 나무를 오르는 것은 산악등반과 차원이 다른 거예요. 산은 나의 취미생활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가는 거지만, 아보리스트는 나무를 돌보고 치료하며 합일을 꿈꾸는 그런 행위인데다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실은 가장 안전한 지점만 딛는 등반이더라고요.”

나무 오르기 전 매듭 교육을 하는 아보마스터 김병모씨와 수강생들.
그러다 김병모씨가 운영하던 광고회사가 문을 닫고 오대산 자락 부연동으로 숨어든 2007년, 빽빽한 밀림과도 같은 숲에서 아보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단다. “나무 한그루를 베려다 보면 넘어지면서 다른 나무에 걸리죠. 벌목할 때는 보통 두 나무를 다 베어버리는데 하나를 살릴 수는 없을까, 고민하다가 아보리스트들한테 배운 대로 해보기 시작했어요.” 김병모씨의 말처럼 아보리스트는 잘라야 할 가지, 잘라야 할 나무, 캐야 할 씨앗들을 고르는 섬세한 일을 한다. 장비를 쓰지 않고 몸으로 일하기 때문에 숲의 손해를 줄일 수 있다. 이곳은 4년 동안 그가 기계장비 없이 혼자서 나무를 베어 만든 아보리스트 교육장이다. 그러나 위험은 언제나 그들을 따라다닌다. 김병모씨는 “탄광보다 사람이 더 많이 죽는 곳은 숲이다. 우리나라에선 실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임업노동자들은 재선충 방제를 하다가도, 절을 덮치는 위험목을 제거하다가도, 쉽사리 나무에 깔려 죽는다”고 했다. 임업노동자들의 목숨값을 높이는 아보리스트 교육을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50명이다. 그들 중엔 고공구조를 해야 하는 119 구조대원들도 있었다. 아보리스트들은 수목관리뿐 아니라 숲 놀이시설을 만들고 안전진단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나무를 치료하는 거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굳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노는 것은 숲을 어지럽히는 일 아닐까? 숲밧줄놀이연구회 강성희 대표는 “나무에 쇠줄을 두르고 놀이시설을 설치하면 부름켜까지 다치게 할 수 있지만 요즘엔 천공법이라고 해서 나무에 구멍을 뚫고 쇠로 고리를 거는 방법을 쓴다. 썩은 부분을 잘라내는 나무 수술 방법과도 비슷해 나무 성장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숲밧줄놀이연구회는 지난해 유명산, 청태산 휴양림에 밧줄놀이터를 만들었다. “밧줄을 타고 올라가면 출렁이니까 조절능력이 생겨요. 게다가 올라갔을 때 성취감이 엄청나죠. 장애아건 비장애아건, 몸치건 운동선수건 밧줄 위에선 모두가 자유롭게 놀죠.” 숲밧줄놀이연구회 윤충현 부산경남지회장의 말이다. 어린이 밧줄놀이는 보통 60㎝ 높이에서 밧줄을 타고 논다. 어른들은 10m 넘는 나뭇가지까지 오르기도 한다. “숲에 들어가서 좋은 음식 먹고 자는 게 힐링이 아니라 숲에서 놀아야 에너지가 솟고 삶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숲에서 난생처음 줄을 타고 나무를 오르는 경험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다시 한번 올라가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윤충현씨는 “늘 휠체어에 앉아 남들보다 낮은 땅만 바라보다가 나무에 올라보니 다시 내려오고 싶지 않더라는 한 장애여성”의 이야기를 전했다. 처음으로 나무 위에 올라가서 “내가 피카소가 된 것 같다. 이제 세상이 입체적으로 보인다”며 눈물을 흘린 수강생도 있었단다.

나무 위를 오르면 삶의 넓이가 아닌 높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보리스트 일 자체가 그래요. 어찌 보면 노동이 노동이 아니라 즐거움이죠. 나무 위에서는 일체의 생각이 없어지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행위에 딱 집중이 되면서 머리가 맑아지죠. 어떤 명상보다도 강력해요. 한가지 동작마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기 때문에 피곤한 줄 몰라요.” 7년 동안 ‘나무 위를 걸어온’ 김병모씨의 말이다.

그날 처음으로 나무 위로 올라간 이정순씨는 이런 소감을 남겼다. “세상에, 이게 꿈 아니야? 내가 여기까지 올라왔잖아.”

강릉/글·사진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강용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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