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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5.28 19:16 수정 : 2014.05.29 09:52

사진 이우성 제공

[매거진 esc] 좋아서 하는 인터뷰

나는 자주 검색창에 내 이름 ‘이우성’을 치고 엔터키를 누른다. 여러 이우성이 나온다. 저명한 원로 학자 이우성 선생이 계시고, 두산베어스 소속 젊은 야구 선수도 있다. 작가도 있다. 물론 나다. 그런데 한 명 더 있다. 그림 그리는 이우성이다. 나는 그 이우성을 본 적도 없는데 경쟁심을 갖게 됐다. 나는 시를 쓰고, 그는 그림을 그리지만 둘 다 작가니까, 내가 더 유명해졌으면, 하고 생각한다. 다행히 그 이우성보단 이 이우성이 더 유명한 것 같았다. 나는 언젠가 이우성이 이우성을 만날 거라고 막연히 믿었다.

아직 그 이우성을 만나지 않았다. 그는 두 개의 단체전을 준비 중이다. 시인이며 패션잡지 기자이기도 한 이우성보다 더 바쁘다. 그래서 서면으로 질문을 적어 보냈다. 궁금한 게 무지 많았다. 그림이 왜 이렇게 폭력적이냐? 사회에 불만 있냐? 많은 사람들이 회화가 낡은 장르라고 말하는데 지금 회화를 하는 것이 지루하진 않냐? 질문의 품격이 떨어진다. 안다. 메일을 보내며 한 가지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이우성을 질투하고 있구나.

솔직히 나는 이우성이 싫었다. 예를 들면 2013년작 ‘무너진 가슴’ 같은 것. 이 작품은 가슴을 자른다. 스팸 자르듯. 그런데 시각적으로는 잔인하지 않다. 명랑 만화의 한 컷 같다. 그걸 그렇게 태연하게 그려도 되냐는 말이다. 2012년 ‘도망’은 등장인물이 상점 건물에 불을 지르고 도망간다. 아주 좋다고 웃으며 뛴다. 그런데 맥락이 없다. 불을 왜 질렀지? 나는 이런 게 싫었다. 하지만 싫다는 말은, 복합적이다. 그런 태연함, 그런 맥락 없음은 내가 시에서 구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못하고 그림 그리는 이우성은 한다.

이우성이 언제나 싫었던 것은 아니다. 이우성이 2012년에 했던 전시 <우리가 쌓아 올린 탑>은 그를 좋아할 이유가 됐다. 그 전시는 회화를 회화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분리시킨다. 이우성의 회화와 영상 작품은 보일러실에 전시됐다.(이 광경은 꼭 보아야 한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찾을 수 있다.) 회화가 끝난 시대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고루한 장르라고 한다. 미디어아트와 실험적인 설치 작품이 전시장마다 꽉꽉 차 있으니까 만약 내가 회화 작가라면 소외감을 느꼈을 것 같다고, 여러번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쌓아 올린 탑>에서 벽을 넘는 순간을 본 것이다.

이우성의 무례한 질문에 다른 이우성은 성실히 답했다. “제 그림이 폭력적으로 느껴지시나요? 그리고 태연하기까지? 사이코패스처럼 보여질까 봐 걱정이네요. 저는 ‘행복’에 대해 생각해요. 무엇이 행복이고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 행복이 있기나 한지, 혹은 행복의 순간을 어떻게 지속시켜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 반면 제가 사는 시간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어요. 어떤 날은 바쁜 일도 없는데 빨리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의도적으로 천천히 걷기도 합니다. 그러다 다시 잊고 빨리 걷고 뛰죠. 알 수 없는 무엇인가로, 내 것이 아닌 것들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밑줄 치고 싶었다. 그리고 우울했다. 지금은 행복을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모든 작가는 시인이든 소설가든 미술가든 이런 고민을 한다. 작가는 결국 시대에 굴복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굴복시키는 시대가 지금보다는 우아했으면 좋겠다. 나는 동시대가 싫다. 어찌 됐건 작가는 ‘불안’과 싸운다. 시 쓰는 우성이는 그 불안에 눌린다. 그림 그리는 우성이는 불안과 맞선다.

“삶 속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갈등,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속에서 수평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제 작업의 소재들입니다. 그렇다고 패배주의적이거나, ‘병맛’을 재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난 살아 있어라고 혼잣말하는 그 불빛을 그림 속에 담고 싶었습니다.”

그는 또 메일 끝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 175갤러리에서 오픈하는 전시 <카테고-라이징>에는 푸른색 천 위에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담아내는 그림을 그렸고요. 이번주 금요일에 시청각갤러리에서 오픈하는 전시 에는 과거의 작업을 다시 불러와 현재화하는, 벽화 작업과 만화 작업을 제작했습니다. 모두 단체전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역시 글은 내가 잘 쓴다. 그런데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보러 가야겠다. 다른 이우성을 이번엔 만나야겠다.

이우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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