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종로4가 청년가게에서는 물건을 살 뿐만 아니라 함께 만드는 워크숍 과정이 수시로 열린다.
|
[매거진 esc] 라이프
노원·종로·송파 등 지하도의 죽은 상권에 공방 등 사회적 기업 들어서며 지역 주민 문화공간으로 재생
|
서울 종로4가 청년가게에서는 물건을 살 뿐만 아니라 함께 만드는 워크숍 과정이 수시로 열린다.
|
바로 옆 떡집에서 나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 맡으며 바느질이 한창이다. 지난 23일 서울 노원구 하계동 장미아파트 안에 있는 지하상가에서 열린 ‘규방 공예’ 강좌에서 수강생들이 알록달록 조각보를 들고 모여 앉았다. 옆 교실에선 재봉틀 돌리는 소리며 커피콩 가는 소리로 분주하다. 장미아파트 지하상가가 ‘장미마을 수공방’이라는 새 이름을 얻은 뒤 생겨난 풍경이다.
|
서울 노원구 하계동 장미아파트 지하상가는 장미마을 수공방과 카페로 새롭게 단장했다.
|
장미마을 수공방 장미아파트 한가운데 제법 큰 상가가 자리잡고 있다. 1990년대 서울 석촌호수 일대가 철거될 때 그곳 상인들이 옮겨오면서 만들어진 상가는 한때 시장 노릇을 톡톡히 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오던 상인들은 10년 전만 해도 지하상가 가장자리에는 식당, 옷가게, 미용실이 죽 둘러서 있었고 가운데는 채소, 생선, 고기를 파는 수십개 좌판으로 붐볐다고 말한다. 그러나 몇년 전부터 근처에 대형마트 5곳이 연달아 들어오면서 지하는 물론 위층 가게도 텅 비었다. 지난해까지 지하상가 가게 39곳 중 남아 있던 가게는 12곳. 그나마 대부분이 휴업 상태거나 배달음식점, 출장수리점이라서 바닥부터 천장까지 시커멓게 변해버린 상가는 누구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낮이든 밤이든 어둡고 조용하기만 했다.
올해 초 공방을 만들겠다는 노원구의 계획이 서울시 주민참여예산의 지원을 받으면서 지하상가에 새롭게 불이 켜졌다. 먼지 덮인 채 잊혀져가고 있던 빈 좌판들의 270㎡ 넓이에 ‘장미마을 수공방’ 강의실 4개가 들어섰다. 바리스타 과정을 밟은 수강생들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도 열렸다. 떡집, 쌀집, 철물점 등 가장자리에 원래 있던 가게들은 대부분 그대로지만 그중 빈 가게 하나를 터서 공방에서 만들 물건을 판매하는 곳으로 개조했다. 낮은 유리 칸막이로 만든 강의실에선 가죽 공예, 천연 화장품 만들기, 자수, 캘리그래피 등 손으로 만들고 그리는 20개 강의가 하루 종일 열린다.
한 수강생은 “매일 집에 혼자 있었는데 이제는 나와서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집중도 해보는 이 공간이 소중하다”고 했다. 강좌를 운영하는 노원구청 일자리경제과 장주현씨는 “주민들이 이곳에서 수공예 노하우를 쌓아 작품을 만들거나 1인기업으로 발전하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장미마을 수공방은 7월부터 71개 강좌가 열릴 예정이다.
대형마트 들어서며
문닫은 소매점·지하상가
시 지원으로 공방 변신
월 2만~3만원에 배우고
완성작품 판매도
|
서울 노원구 하계동 장미아파트 지하상가는 장미마을 수공방과 카페로 새롭게 단장했다.
|
종로4가 청년가게 노원구청은 서울 노원구에 장미아파트 상가 말고도 5~6곳 지하상가가 빈 채로 방치되어 있다고 했다. 오가는 사람의 발길을 잡던 지하도 상가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서 꼽아보니 2013년 전국 지하도에 있는 가게 1만2751곳 중 798곳이 비어 있다. 한때 호황을 누리던 지하도 상가는 복합쇼핑몰과 대형마트에 손님을 뺏기면서 급히 쇠락했다.
서울 방산시장 앞 종로4가 지하도 상가도 그랬다. 한때 방산시장의 진입로이면서 혼수용품 전문 상가들이 밀집했던 이 곳은 3년 전 땅 위에 횡단보도가 생기면서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2013년 기준 102개 점포 중 20곳이 비어 있었고, 그나마 짐을 그대로 두고 문을 열지 않는 가게들도 많았다. 이곳을 관리해온 서울시설공단은 지난해 말부터 서울시 청년일자리허브(청년허브)에 빈 점포를 내주었다. 이곳에 가게를 내고 싶은 청년들이 청년허브를 통해 신청하면 자기 가게를 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스템이다.
지난해 12월, 쓰리세븐 가방, 삼보라사, 뉴스타양복점 같은 30년 된 점포들 사이사이 양말 인형을 만드는 꼬랑내 프로젝트, 손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하는 사부작 연구소, 가죽공예점 레이지 파머스, 재개발 지역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수집하는 서울 수집기 등 이름도 낯선 청년들의 가게가 열렸다. 지난 18일에는 독립잡지 <헤드에이크> 편집팀이 이곳에 ‘다시서점’이라는 독립출판물 전문 서점까지 차렸다. 오래된 가게들 사이에 청년들의 가게를 내는 ‘종로4가 청년가게’의 본부는 27년 된 가게 목화보석에 차려졌다. 이곳에서 만난 청년가게 활동가 박수철씨는 “이곳은 오래된 이야기가 있는 물건, 직접 손으로 빚은 물건들을 주로 팔면서 생산자와 소비자를 잇는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14곳 청년가게들은 매달 워크숍을 연다. 한복부터 로봇까지 직접 만들고 고치는 법을 알려준다. 생산자의 아이디어와 바쁜 손놀림이 만나는 자리다. 올 여름쯤엔 청년가게들이 모여 만들기 하루 체험도 하고 가게 주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도 열 예정이다. 다시서점 주인인 정지원씨는 “홍대나 연남동은 임대료가 비싼데다 전문 서점들이 이미 포화 상태였다. 종로4가라서 독립출판물뿐 아니라 근처 광장시장과 황학동에서 찾은 오래된 물건과 기념품들을 들여놔도 어울린다. 게다가 서점을 열어보니 광장시장을 찾는 젊은이들, 외국인들, 비를 피하러 온 손님들이 이런 곳에 신선한 청년들의 가게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신기해한다. 혼수 쇼핑센터로서의 지하상가는 이제 시들해졌지만 또다른 붐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라며 기대를 드러냈다.
|
송파 지하보도를 개조해 만든 송파 마을예술창작소의 강의실.
|
송파 마을예술창작소 그보다 앞서 2013년 10월엔 서울 송파지하보도에 ‘송파 마을예술창작소’가 문을 열었다. 지난여름 송파사거리에 횡단보도가 생기면서 17년 된 송파지하보도가 쓰일 일이 없어졌다. 상가들이 떠난 자리는 예술창작소로 바뀌었다. 410㎡ 넓이의 지하보도는 예술가들의 작업실, 전시실, 강의실로 새 단장했다. 송파구청에서 강좌를 진행하던 예술가들과 동아리 회원들이 창작소 운영을 맡아 목공예, 바리스타, 규방공예, 가죽공예 등 10여개의 생활예술강좌를 열었다. 매달 마지막주에는 동네에서 일하는 생활공예 작가와 예술가들이 모여 장터를 열기도 한다.
송파마을 예술창작소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슬리퍼 신고 가벼운 마음으로 동네 공방을 들르는 주민들도 있고, 큐레이터도 있고, 목수도 있고, 음악가도 있었다. 창작소는 이들의 동네 기지다. 이곳에서 수채화 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김정아씨는 “이전까지 ‘송파구 쪽엔 공동육아 하는 곳은 많아도 공동문화예술 하는 곳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네에 공공의 문화공간이 아예 없었다. 문화예술을 아우르는 공동의 장소를 마련하고 동네 예술가들의 허브 역할을 하자는 것이 이 공간을 함께 마련한 동네 예술가들의 목표였다”고 전한다.
그림이나 공예를 하나 배우기 위해 내는 돈은 한달에 2만~3만원. 비어 있는 지하도를 이용하지 않았다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게다가 수강생들은 아마추어가 모인 공방에서 만든 작품을 함께 팔고 유통하는 자립적인 기지가 되기를 꿈꾼다.
“6월 말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아트 마켓을 열 예정이에요. 우리가 만든 작품이 처음으로 햇빛을 보는 거죠.” 김정아씨의 말이다. 지하공간에서 공방의 꿈이 무르익는다.
글·사진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송파구청, 청년허브 제공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