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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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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성석제의 사이(間) 이야기
체코 대표맥주 필스너 우르켈의 산지에서 마신 맥주의 황홀한 첫맛, 시원섭섭한 끝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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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업원이 묵직하게 대답했다.
토끼, 라고
우리는 안주문했다 외치고
그녀는 주문했다 주장했다
했다, 안했다 랠리가 수십번 오갔다
필스너 맥주는 물이 89~91%로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탄수화물 3.5~4.5%, 알코올 성분 3~5%, 거품인 이산화탄소 0.5%, 조단백질, 회분, 비타민, 홉 성분 등이 미량 들어 있다. 인체의 구성 성분은 물이 67% 이상, 단백질 15%, 지방 13%, 비타민과 무기염류 4%, 탄수화물 1% 등이다. 사람은 물보다 맥주에 더 가깝다. 체코에 갔을 때 맥주의 고향인 플젠을 간 건 당연했다. 플젠에는 원조 필스너 맥주를 생산하는 커다란 공장이 있었고 공장에서는 버스를 타고 두 시간쯤 구내를 돌며 견학과 시음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탄 차가 맥주공장 정문 옆에 있는 커다란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시동을 건 채 서 있었다. 재빨리 매표소로 달려가 표를 사서 버스로 달려갔다. 버스 앞에 우람한 체구의 여성이 서 있다가 우리를 막아섰다. “이 버스는 오전 10시에 시작하는 견학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사람들만 태우고 갑니다. 그 표로는 다음 버스를 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다고 외국어와 운전에 천재인 J형이 통역해 주었다. “빈자리도 많은데 그냥 좀 타고 가면 안 돼요? 이거 놓치면 두 시간은 기다려야 하는데.” 우리가 간청을 했지만 안내원은 코끝도 까딱하지 않고 다음 버스를 타라고 했다. “거참 빡빡하게 나오시네. 꼭 여자 쿤데라처럼 생겨가지고.” 애원도 투정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럴 경우에는 화가 나는 게 자연스러운 정서적 반응이다. “아, 그거 맥주 만드는 걸 꼭 봐야 맥주 맛이 나나? 벼농사 짓는 거 못 봐도 밥맛만 좋더라. 표 무르자.” 견학을 포기하고 나니 남은 일은 맥주를 마시는 것밖에 없었다. 식당 입구에는 ‘이 식당의 좌석 수는 1500석으로 독일 뮌헨의 동쪽에서는 가장 큼’이라는 요지의 영어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좌석 3600석, 한꺼번에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뮌헨의 호프브로이하우스를 의식한 것 같았다. 아무튼 초등학교 때 같으면 2부제 수업을 시작할 오전 시간부터 맥주를 마시러 간 건 머리에 털 나고 처음이었다. 자리에 앉자 견학버스 안내원의 언니처럼 보이는 몸매에 붉은 얼굴, 필스너 빛깔의 머리칼을 한 여성이 다가왔다. 그녀가 가지고 온 식단은 체코어와 독일어로 되어 있었다. “우리가 여기에 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체코 사람, 독일 사람으로 보이나?” 영어 메뉴는 물론 있었다. 하지만 다시 가지러 가기가 귀찮은 눈치였다. 다행히 주요 메뉴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주문을 할 수 있었다. 원조 필스너 네 잔, 그리고 체코에 와서 맛을 들인 구야시(굴라시)는 말로 한 접시 주문하고 식단 상단에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닭구이를 손가락으로 주문했다. 맥주가 먼저 날라져 왔다. “크허허허허!” 황금빛 원조 필스너의 살아 있는 맛을 경험한 우리는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식당 안에는 우리 말고도 100여명의 사람들이 이미 맥주를 마셔대는 중이었다. 맥주를 두 잔째 주문했을 때 안주가 날라져 왔다. 그런데 걸쭉한 소스가 뿌려진 먹음직스러운 구야시는 알겠는데 두 번째 접시에 담긴 내용물은 생소했다. “닭같이 안 보이는데? 뭐예요, 이거?” 우리가 묻자 종업원은 천천히, 묵직하게 대답했다. 토끼, 라고. 일행 네 사람 중 토끼띠가 둘이나 있었는데 쥐띠인 내 입에서 비명이 나왔다. 토끼띠인 J는 그 음식의 값이 다른 것에 비해 두 배쯤 비싸다는 것을 알아냈다. 우리는 앞을 다퉈가며 “이 음식을 주문하지 않았으니 얼른 가져가고 주문한 것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가 바로 그 음식을 주문했다고 주장했다. 했다, 안 했다의 랠리가 수십번 오갔다. 4 대 1로 남녀 혼성대결이 벌어지는 테니스 코트 같았다. 결국 그녀가 졌다. 접시를 가지고 돌아서는 그녀의 입에서 무슨 바람 소리 같은 게 흘러나왔다. 그녀가 가고 난 뒤 외국어 천재 J형이 말했다. “저 여자 우리한테 욕했어.” 맥주잔과 구야시가 든 접시를 재빨리, 깨끗이 비우고 난 뒤 우리는 계산대로 향했다. J형이 앞장을 섰다. 그는 식당 관리 책임자를 불러달라고 했다. 양복 입은 남자가 나왔다. 수염이 난 게 드보르자크를 닮았다. J형이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우리의 주문서와 실제로 우리가 먹은 것이 차이가 있는 것 같아서 바로잡으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주문을 담당한 종업원의 불손한 언행에 대한 사과를 당사자로부터 직접 받고 싶다.” 잠시 못 본 사이에 더 우람해진 듯한 종업원이 나왔다. 체코어와 영어가 섞인 몇 번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그녀는 결국 우리에게 사과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황금빛 햇살이 더욱 강하게 내리쬐었다. “아까 그 토끼 요리 주문하는 사람이 하루에 몇이나 될까?” “그러게. 그 여자가 먹어야 하는 건 아닌지 몰라.” 후련한 것 같기도 하고 미안한 것 같기도 하고 고마운 것 같기도 하고 섭섭한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원조 필스너의 뒷맛이었다.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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