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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계곡 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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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여행
계룡산 자락의 숨겨진 아름다움 품은 공주 상신계곡과 상신마을
동쪽 동학사, 서쪽 갑사보다
찾는 이 적은 골짜기 마을
맑은 물줄기 아담한 폭포들
토속·유교문화 조화 이룬 유적
“우덜 마을이 참 유서 깊은 마을이유. 바윗덩이에 새긴 글씨 하나, 다랑논 축대 돌멩이 하나도 소중한 겨. 다 지켜야 허는디 요즘 그게 잘 되남? 다 팽개쳐 노니.” 골마다 들마다 선인들이 깃들어 살던 우리나라 산천. 유서 깊지 아니하고 전설 한 자락 안 서린 마을이 어디 있을까. 개발 숭상 시대에, 그 깊은 내력을 지키고 보전하려는 노력이 모자랐을 뿐이다. 그래도 희망이 있는 건, 마을마다 지킴이 구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충남 공주 상신리의 고주환(54·농촌체험휴양마을 추진위원장)씨도 그런 분 중 하나다.
“저기 글씨 보이잖유? ‘계집 녀’에 ‘내 천’. 저기가 아녀자들 목욕탕이여.” 고씨가 가리키는 냇가 너럭바위에는 ‘여천’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옛날에 여자들이 어디 목욕이나 편하게 하간? 저렇게 써서 딱 정해 놓고 ‘남정네들은 접근하지 말라’ 하는 규범을 만든 겨, 얼마나 훌륭한 풍습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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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신리는 계룡산 북쪽 등산로 들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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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북쪽 맑은 물길 이어지는 용산구곡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160가구 350여명)는 계룡산 북쪽 자락 깊숙이 자리한 골짜기(상하신계곡) 마을이다. 계곡을 따라 올라 남매탑이나 금잔디고개로 넘어가는, 계룡산 등산로 입구 중 하나다. 유명 사찰을 끼고 있어 산행 인파가 몰리는 계룡산 동쪽 동학사나 서북쪽의 갑사, 서남쪽의 신원사 등산로보다는 찾는 이가 매우 적은 골짜기 마을이다. 골 깊고 물 맑고 호젓하면서도 숲 울창한 이 마을은 선인들 발자취가 즐비한데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체험행사도 풍성해 여름철 가족 여행지로 삼을 만하다.
먼저, 큰 규모는 아니지만 맑은 물줄기와 바위계곡을 거느린 골짜기(4~5㎞)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 계곡(상신계곡 또는 상하신계곡)이 예로부터 쉬고 노닐 만한 물길이었다는 사실은, 골짜기의 바위 곳곳에 새겨진 ‘동천’ ‘용산구곡’ ‘강산풍월’ 등 바위글씨들이 드러내준다. ‘동천’(洞天)이란, 산 좋고 물 맑고 경치 빼어난 골짜기를 일컫는 말로, ‘신선들이 살 만한 곳’을 뜻한다. 옛사람들은 흔히 이런 곳에, 아홉개의 경치를 꼽아 이름을 달고 경치 이름과 함께 시를 지어 바위에 새겨두곤 했다.
상신계곡의 ‘용산구곡’은 조선 말 문신인 취음 권중면(1856~1936)이 이름 붙이고 바위에 새겼다고 알려진다. 권중면은 ‘을사오적’ 중 하나인 친일파 권중현의 동생이자, ‘도인’으로 이름난 권태훈(소설 <단>의 주인공이 된 인물)의 아버지다. 대한제국 말 능주군수를 지내던 권중면은 ‘을사늑약’을 계기로 형 권중현과 의절하고, 1907년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다 1916년 상신리에 들어왔다고 한다.
골짜기엔 ‘가마소’ ‘용둠벙’ ‘신소’ ‘마제소’ ‘우멍거지’ 등으로 불리는 소(물웅덩이)들과 아담한 폭포가 줄을 잇는다. 볼만한 바위 자락엔 어김없이 경관 내용을 담은 글과, 권중면과 그의 제자들 이름 등이 새겨져 있다. 용산구곡의 용산은 계룡산을 뜻하는데, 아홉개의 경치(9곡)의 이름엔 심용문(1곡)·은룡담(2곡)·와룡강(3곡) 등 모두 ‘용’ 자가 들어 있다. 용이 이 골짜기에서 숨어 살며 수련한 뒤 여의주를 얻어 승천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궁산을수’ ‘태극암’ 등 풍수와 관련된 글씨들도 보인다.
골짜기를 따라 물가 산자락엔 잡초 무성한 계단식 논들이 이어진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고 어르신들만 남으면서, 버려지다시피 한 옛 경작지들이다. 물이 풍부해 천수답이라곤 없던 옥토였다고 한다. “이 석축들 좀 보세요. 조상들이 대대로 힘들여 쌓고 보수해 만든 경작지들입니다. 이젠 아무도 돌보지 않아 다 무너져가고 있어요.”(고주환 위원장) 고씨는 선인들이 땀 흘려 일군 다랑논이 방치되는 걸 안타까워했다.
잡초가 무성한 빈터는 마을 안에도 있다. 마을을 등지고 이 마을의 ‘주산’(핵심을 이루는 으뜸 산)이 솟아 있는데, 산 앞으로 두 개의 낮은 언덕이 가로지르며 주산을 둘러싼 형국이다. 두 언덕 사이에 있는 널찍한 터가 백제 말 또는 통일신라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는 옛 구룡사 터다. 절이 언제 폐찰이 됐는지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폐사지 넓이로 보아 한때는 꽤 규모 큰 절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신리는 옛 구룡사의 사하촌(절로 인해 생겨난 절 아랫마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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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신마을 한복판의 당간지주. 옛 구룡사 당간지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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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신리 인절미 떡메치기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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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곧은 선비 자취 뚜렷한 농촌체험마을 상신리
이 마을엔 절과 관련된 지명이 무수히 전해온다. 부도골(부도밭이 있던 곳)·북다리미(북을 매달았던 곳)·중나루(스님들이 노닐던 물가)·법당골·바랑골 등이 그것이다. 결정적인 절 유물은 마을 한옆에 서 있는 당간지주다. 지주석 일부가 깨지고 금간 것을 보수한 모습이다. 한때 당간지주는 주막집의 울타리의 일부로 쓰였다고 한다.
이 마을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불교문화가 승한 계룡산 자락의 다른 골짜기 마을과 달리, 불교 자취뿐 아니라 토속신앙·유교문화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면면히 보전돼오고 있다는 점이다. 마을 전통문화의 핵심인 산신당이 남아 있고, 서당터도 네 곳이 남아 있다. 마을 들머리엔 장승과 솟대가, 마을 안엔 큰샘·옷샘 등 신성시하며 식수로 써온 옛 우물터도 두세 곳이 남아 있다. 그저 남아 있기만 한 게 아니다. 주민들은 해마다 2차례씩 산신당에 산신제를 올리고, 장승과 선돌(선사시대 유적)에도 따로 장승제를 지낸다. 제를 올릴 땐 마을 한복판에 있는 큰 샘에 고인 물을 다 뽑아내고 새 물을 받아 사용한다고 한다. 이뿐이 아니다. ‘신야도원 별밤 축제’, ‘계룡산 철화분청사기 축제’(연 2회), ‘월하 감 곶감 만들기 축제’ 등 갖가지 마을 축제를 해마다 펼친다.
고 위원장은 “조선 말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100가구 정도 살던 이 마을에 서당이 4곳이나 있었다”며 “학문과 선비정신을 물려주려는 선비들이 있었고 주민 향학열도 높았기 때문”이라고 자랑했다.
이런 마을들에선 올곧은 학자들이 배출되게 마련이다. 이 마을은 1973년 중앙정보부 유럽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조사받다 고문으로 숨진, 당시 서울대 법대 최종길(1931~1973) 교수의 고향이기도 하다. 최 교수는 유신 독재 치하에서, 민주화 시위를 하던 학생들 편에 서서 소신을 굽히지 않은 법학자였다.
‘농촌체험 휴양마을’인 상신리에선 철마다 도시민을 대상으로 한 다채로운 농촌체험행사를 운영한다. 귀농 가구도 있고, 다문화 가구도 있는데, 농사짓는 집은 몇 집 안 되지만 47가구가 참여해 체험행사를 꾸려간다. 예약을 받아 가족이나 단체 단위로 목이버섯 따기 체험, 목이버섯만두 만들어 먹기, 떡메 쳐서 인절미 만들어 먹기, 도자기 공예 체험 등을 진행한다. 참가비는 1인당 5000원 안팎.
‘신야춘추 도원일월’(상신리 마을의 세월은 무릉도원의 나날이네)이란 글이 새겨져 있는 마을 입구의 선돌과 목장승들, 상신리에 남아 있는 옛 돌담골목과 이참봉댁 등 고택도 볼거리다. 계곡에선 ‘중택이’(버들치)도 잡고 가재도 잡을 수 있다. 마을 한쪽엔, 상신리의 전통과는 관련이 없지만 도예촌이 형성돼 있어 따로 도예체험을 할 수 있다.
주민들은 마을의 전통을 지켜가기 위해, 앞으로 네 곳의 서당터와 상여집, 샘터 등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고 전통문화 체험행사도 꾸릴 예정이다.
공주/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사진 상신리 고주환 위원장 제공
>>> 상신리 여행정보
가는 길 수도권에서 경부고속도로 타고 가다 천안~논산고속도로로 바꿔탄 뒤 공주나들목에서 나간다. 공주시청 쪽으로 우회전해 생명과학고 교차로에서 좌회전해 직진, 청벽대교 건너 희망교차로에서 우회전한 뒤 상신리(상하신리)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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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닭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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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곳 반포면 상신리에 상신식당·등산로식당·골목길식당·고향마을식당 등 식당이 네 곳 있다. 순두부 등 두부를 직접 만들어 내고, 도토리묵·닭백숙 등을 내는 집들이다. 반포면 공암리 내고향묵집은 묵무침과 함께 황기닭백숙(사진) 등 닭요리로 이름난 집.
묵을 곳 공주시 웅진동에 깨끗한 한옥 숙박체험 시설인 공주한옥마을이 있다. 동학사 들머리에 모텔·펜션들이 있다.
여행 문의 공주시청 문화관광과 (041)840-8080. 상신리 농촌휴양체험마을 010-8811-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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