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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 여경문. “여경문에 올라보지 않고 낙양을 봤다고 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만큼 낙양을 상징한다. 현재의 건물은 복원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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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여행
동양문명의 발원지 중국 ‘중원’을 가다-한겨레 동양사상 테마여행 2탄 ‘주역 현장 답사’
“왜 선생님들은 비싼 돈 들여 중국까지 와서 무덤만 찾아다니나요?”
여행 사흘째, 현지인들도 잘 모르는 길을 찾다가 지친 가이드가 던진 질문이다. 이 질문 아닌 질문에 사실 이번 테마여행의 성격이 함축돼 있다. 물론 일행이 무덤만 찾아다닌 것은 아니다. 6박7일 동안 중국 허난(하남), 산둥(산동)성 일대의 12개 시·현을 방문해 10여개의 주요 유적지와 5개의 크고 작은 박물관을 ‘답파’했으니. 이동 거리만 장장 4천리(1600㎞). 직접 눈으로 보고 사진에 담은 고대 문명의 위대한 흔적들은 황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동아시아인이라면 모두가 같은 문명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지난 6월 한겨레신문사가 주관한 ‘한겨레 테마여행-동양의 미래학, 주역의 현장을 찾아서’는 그런 점에서 일종의 뿌리 찾기 여정이다. 유교3경의 하나인 <주역>을 중심 테마로 삼아, 갑골문에서 공자에 이르는 동아시아 문명의 발생지를 답사하여 우리 한민족의 정신적·문화적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허난·산둥성 일대
안양·낙양에서
북망산·개봉까지
주요 유적지와 박물관 찾아
4천리를 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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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로 일식을 기록한 갑골문(복제). 가운데 세 글자가 ‘해가 먹히다’는 뜻의 ‘일유식’(日有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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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빛을 따라서 안양·낙양·정주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하남(河南·허난)성 일대를 중국의 중심(중원), 그 중원의 중원을 낙양(洛陽·뤄양)으로 여겼다. 낙양(고대 주나라의 수도)을 중심으로 안양(安陽: 고대 은나라의 수도)과 정주(鄭州·정저우: 춘추전국시대의 중심지)는 5천년 전부터 중국 문명의 거점 지역이다. 사방 500~600리에 걸친 이 일대에는 고대 이래 변하지 않은 지명들이 여전히 이정표 위를 수놓고 있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역사의 흐름을 실감케 한다.
산둥성 제남(濟南·지난)공항을 출발해 산 하나 없는 화북평원을 4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안양은 은허(殷墟: 고대 은나라 유적지)의 도시이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대 유적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인류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은허박물관을 대표하는 청동솥 ‘사모무’(司母戊)를 비롯한 거대한 청동기물들은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한자의 원형이 되는 갑골문은 한자문화권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일식을 처음 예측하고 기록한 갑골 앞에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 같다. 한 손에 석판을 들고 밤하늘의 별자리를 가리키던 고대인의 예리한 눈빛을 상상하노라면, 마치 인류 문명의 장엄한 여명을 함께하고 있는 듯하다.
낙양은 그 이름 자체가 서울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쓰일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고대 주나라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낙양에는 중국 예악(禮樂)문화의 건설자이자, <주역>의 효사(역의 괘를 이룬 여섯 개의 획. 또는 이에 대한 설명)를 지었다는 주공 묘가 있다. ‘천자는 여섯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제후는 네 마리 수레를 탄다’는 고대 기록을 유물로 증명한 ‘천자수레’가 발굴된 곳도 이곳이다. “이곳에 오르지 않고서 낙양을 보았다 하지 말라”는 낙양의 명승 여경문(麗景門·리징먼)은 사람들이 거주하며 장사를 하고 있다. 가난에 내몰린 사람들이 성루를 ‘점거’(?)한 채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한 것이 그대로 굳어졌다고 한다. 이들을 내몰지 않고 ‘근대 여경문’의 일부가 되게 한 중국 사회주의는 수천년을 이어온 여경문에 또 하나의 역사를 추가한 듯했다.
춘추시대 정나라의 중심지인 정주에선, 5천년 전 노예들이 쌓았을 거대한 궁전 토벽(하남성 정주시 상대 박읍성 유지)이 가슴에 남는다. 10미터는 족히 넘을 높이의 벽을 몇 킬로미터나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겨운 노동에 시달렸을까? 공원으로 조성된 토벽 앞에서 건강체조를 즐기는 노인들과 문화재 보호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 토벽 위를 뛰어다니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에서 역사의 무상함을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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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왕이 7년간 옥살이하면서 역(易)을 풀었다는 주문왕연역처(周文王演易處). 하남성 안양시 남쪽 탕양(湯陽)의 유리성 유적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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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꿈을 따라서 유리성과 하남박물관
고대 동양사상과 관련하여 꼭 찾아볼 곳 중 하나가 안양 인근의 유리성이다. 주나라 문왕이 7년간 이곳에 갇혀 있으면서 주역 64괘의 괘사를 지었다는 곳으로 유명하다. 역은 점을 치는 점서였지만 차츰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담은 철학서로서 탐구되면서 동양정신의 핵심 근원의 하나가 되었다. 유리성 유적지 안에 만들어 놓은 미로 속에 헤매어 보면, 알 수 없는 미래를 먼저 알고자 했던 인간의 나약한 마음을 만나게 된다.
정주의 하남박물원(하남박물관)은 이번 ‘중원 답사’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하다. 황하문명의 발원기에서 청나라 시대까지 하남성 일대에서 발굴·전래된 무려 13만여점의 유물이 소장돼 있다고 한다. 그 엄청난 수의 다종다양한 문화재 앞에서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지만, 주역 여행을 자처한 일행으로서는 고대문물전시관인 ‘문명지광(文明之光)관’ 입구를 장식한 글귀를 잊을 수 없다.
‘강함과 부드러움이 서로 번갈아드는 것이 천문(天文)이요, 문명을 세우는 것은 인문(人文)이다. 천문을 살펴 자연의 변화를 살피고, 인문을 살펴 천하를 조화롭게 한다.’(剛柔交替 天文也, 文明以止 人文也. 觀乎天文 以察時變, 觀乎人文 以化成天下.-<주역> 비괘 단전)
게다가 박물관 중앙로비 바닥에는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노라면 마치 오래전부터 주인을 기다려온 비밀의 봉인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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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성 박물관인 ‘하남박물원’ 중앙 로비에 새겨진 팔방태극. 태극의 원리가 우주의 시작임을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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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관 포청천이 집무했다는 카이펑의 ‘개봉부’. “너의 녹봉은 백성의 기름, 백성을 학대하기는 쉬우나 하늘을 속이기는 어렵다”는 당태종의 말을 새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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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흥망을 따라서 운몽산·북망산과 개봉
안양에서 낙양으로 오는 길에서 들른 삼인사는 은나라 충신들인 비간, 기자, 미자를 모신 사당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 충절의 신들이 현재는 재물의 신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질곡 속에서 복락을 꿈꾼 중국 민중들의 마음을 엿보여준다. 운몽(윈멍)산 귀곡사는 전국시대를 주름잡은 모사가들의 전설로 유명하다. 현대의 중국인들은 귀곡선생이 제자를 가르친 이곳을 군신(軍神)의 유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운몽산 꼭대기에 대만인들이 세운 팔괘성(八卦城) 남천문(南天門)은 중국인들의 지나치리만큼 집착하는 ‘스케일’을 보여준다. 이밖에 백이숙제가 굶어 죽었다는 수양산, 강태공의 고향마을(이곳은 유적임을 알리는 표지만 있을 뿐이다), 신정(新鄭)의 정왕릉박물관 등은 모두 그동안 한국인의 발길이 닿지 않은 ‘명소’였으리라.
낙양 북쪽의 야트막한 북망산은 역대 제왕들과 수많은 영웅호걸, 귀인명사들이 묻힌 곳으로 오늘날까지 무덤이나 죽음의 대명사로 불린다. 수많은 무덤들이 산재한 이 북망산 자락에다 고묘 박물관을 지어놓은 것은 역사의 영고성쇠를 잊지 않으려는 뜻이리라. 역사가 사마광(1019~1086)이 북망산 아래에 살며 했다는 “역사의 흥망을 알고 싶거든 낙양성을 보라”(欲問古今興廢事 請君只看洛陽城)는 말이 새삼 실감나게 다가온다.
정주에서 신정을 거쳐 동쪽으로 차를 달리면 개봉(開封·카이펑)이 나온다. 12세기 지구상 최대 도시의 하나였던 개봉의 하루를 묘사한 청명상하도에는 고려인의 모습도 보인다.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이 그림을 현대 중국인들은 청명상하원이란 공원을 지어 재현해 놓았다. 그리고 그 재현한 실제 풍경을 무대로 삼아 무려 700여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장대한 드라마를 연출해 보인다. 중국 3대 공연물의 하나라는 실경연극 <동경몽화>(東京夢華)다. 절정의 태평성대가 외적의 침입으로 허무하게 끝나는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마지막 장면에 거대한 성들과 거리를 전부 불태우는(물론 조명연출이지만) 장면이 압권이다. 옛 영광과 함께 외침에 의해 멸망당했던 치욕도 잊지 말자는 대국굴기의 다짐이리라. 아무튼 개봉에 들르는 나그네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스펙터클이다.
허난·산둥/글·사진 이인우 <한겨레라이프> 편집장
iwlee21@hani.co.kr
>>> 동양사상 테마기행 정보
중국 허난(하남), 산둥(산동)성 여행은 일정에 따라 지난(제남)이나 정저우(정주)로 들어가 여행을 시작한다. 시차는 한국이 한 시간 빠르다. 우리보다 좀 더 더우며 건조하다. 음식은 우리처럼 짜고 매운 게 많아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뤄양(낙양)의 ‘수석’(탕류), 안양의 ‘도구소계’(닭고기) 등이 유명하다.
테마 기행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관광보다는 유적·유물을 찾아가는 ‘문화 답사’의 성격이 강하므로 개별 여행보다는 관심사를 공유한 단체여행을 권하고 싶다. ‘한겨레 동양사상 테마여행’은 평소 동양 고대문화와 사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맞춤여행이다. 이 테마 기행은 전체 4회로 기획 중인데, 이번 ‘동양의 미래학-주역 현장 답사’는 ‘공맹의 고향을 찾아서’(2013년)에 이은 두번째이다. 앞으로 ‘주자학의 영광과 좌절’, ‘노장과 도가(道家)’ 등의 프로그램도 준비 중이다. 문의 원트래블 여행사 (02)777-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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