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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06 19:19 수정 : 2014.08.07 13:33

일러스트레이션 키 큰 나무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나의 ‘비포 선라이즈’ 찍을 준비됐습니까
설렌다. 기차 또는 비행기의 내 옆자리에 누가 앉을까. 번번이 기대는 배신당하지만 여행의 설렘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낯선 도시, 낯선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 손발이 오글오글해지는 꿈이면 어떤가. 여행길에는 누구나 청춘이 되는걸.

휴가의 절정이 지나간다. 아직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는데 끝이라니, 아쉽기만 하다.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더듬어본다. 낯선 곳으로 떠나며 혼자 설레던 순간, 운명적인 만남을 기대하며 두리번거리던 내 눈빛, 그리하여 마침내 만났던 그 여자 그 남자. ‘벌써 20년 전’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는 기차에서 만난 남녀가 너무도 쉽게 사랑에 빠졌더란다. 나의 ‘비포 선라이즈’는 어땠나. 마주친 눈빛을 피하지 않고 “여기서 같이 내리자”고 손 내밀 용기가 나는 있었나. 휴가지에서 누군가를 만났던 두 소설가와 세 명의 익명 제보자들의 고백을 들어본다.

빨리 내려요! 시간이 없다구요
기차역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며
가장 개인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잘못된 도시에 내렸다 / 서진(소설가)

6년 전, 기차를 타고 20여일간 미국을 횡단했다. 뉴욕에서 시작해 시애틀까지, 도중에 다섯 도시에서 정차해서 삼박 사일 정도를 보내는 일정이었다. 기차 안에서 로맨스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승객이 노년층이거나, 가족 단위였다. 미국 대륙은 텅 비어 있다. 그걸 멍하게 바라봐야 하는 기차여행도 심심하기 그지없었다.

콜로라도주를 통과할 즈음 그녀를 만났다. 보름 동안 기차에서 마주친 유일한 한국 여자였다.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는데 샌프란시스코 근방에서 열리는 단체 캠프 사이트에 간다고 했다. 함께 와인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눴다. 둘 다, 한국어로 대화를 해본 지가 꽤나 오래되어서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대화의 소재가 바뀌었다. 가장 개인적인 부분은 빙 둘러갔다. 밤 열한시쯤 되었을까? 기차는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시티에 멈췄다.

“자, 빨리 내려요! 시간이 없다고요.”

내가 말했다.

“네? 지금 어떻게….”

기차는 대도시에서 20분 정도를 쉰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한 시간 정도를 쉬기도 한다. 기차여행의 묘미는 한순간도 같은 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기차가 정차했을 때엔 움직이지 않는 땅을 밟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진다. 기차가 정차할 때마다 카페에서 음식을 사오거나, 맥주를 마셨다. 물론 늘 혼자서. 이번엔 그녀와 함께 흥겨운 음악이 나오고, 조명이 어두운 바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 물론 움직이지 않는 땅 위에서.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가장 개인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역사도 깜깜하고, 문을 연 바는커녕 카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역무원에게 근처에 문을 연 바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오늘은 일요일이야. 게다가 여기는 솔트레이크시티라고.”

아, 그렇구나. 여기는 모르몬교의 성도라는 것을 깜빡했다. 마약과 음주를 금하는 금욕적인 도시, 솔트레이크시티. 우리는 잘못된 도시에서 내린 것이다.

라면 잘 먹었단 인사는 했던가 / 최진영(소설가)

낯선 해변이 아니었다. 일년에 두어번은 꼭 들르게 되는 곳. 혼자 훌쩍 들르기도 하고, 만나는 남자가 있으면 함께 한번쯤은 찾게 되는 그런 곳. 지난 계절에 지는 해를 보러 그 해변에 갔다. 오랜만에 혼자였다. 혼자였는데, 혼자니까, 웬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슈트보다 반바지, 발라드보다 로큰롤이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영화로 배운 작업 멘트 두개. <봄날은 간다>의 명대사 “라면 먹고 갈래요?”와 홍상수 감독 영화의 단골 멘트 “당신 정말 예뻐요.” 서른살 넘고부터 이 두 문장을 종종 듣는데, 적어도 오백만명은 알 것 같은 그 문장을 듣노라면 내 앞의 그가 참 순진해 보인다. 오이냉채도 오이무침도 오이샐러드도 아닌 생오이를 수줍게 들이미는 느낌이랄까. 해변에서 만난 그는 위의 두 문장을 순서대로 말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에게나 털어놓을 수 있는 서로의 비밀을 두런두런 주고받던 끝에 남자가 물었다. 내일 드라이브 좀 하다가 서울 같이 갈래요? 나는 애매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생각했다. 이 남자와 오늘밤을 보내고 내일 역시 그런다면, 그럼 과연 즐거울까?

즐거울 리 없었다. ‘원나이트’에 대한 호기심은 소싯적 얘기였다. 더는 낯선 몸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때 그 바다에서 그와 키스하며 나를 압도했던 감정은 설렘도 흥분도 아니었다. 짜릿한 하룻밤이고 뭐고, 만사 뻔하고 지루하고 귀찮았다. 하여 나는 인정해야 했다. 인연이나 운명이란 단어에 한없이 심드렁해진 나를. 너와 내가 인연이라 치자. 그래서 뭐? 만나고 소모하고 헤어지겠지. 그런 생각을 전제로 당시에도 나는 두어명과 썸을 타며 배낭여행 하듯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서서히 진행되는 스킨십에 이 한 몸 불타오르기는커녕, 어정쩡한 키스만으로도 감정은 시들고 메말라 볼품없어졌다. 가뭄 끝 콩잎처럼 나는 지쳐 있었다. 그랬다. 그날 해변에서 내게 호감을 보인 그 덕분에 깨달았다. 나는 늙기도 전에 시든 풀이란 걸. 그만 가보겠다는 말로 상황을 정리하고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라면 잘 먹었다는 인사는 했던가? 모르겠다. 다시는 진지한 연애를 할 수 없으리라는 못된 예감으로 저 멀리 밤바다처럼, 눈앞이 깜깜했다.

미남은 가고 변태가 왔다 / 이젠 불도 빌려줄 수 있는 누나

여자 셋이서 유럽 여행을 떠났다. 20대였고, 그땐 몰랐지만, 우린 모두 맑고 예뻤다. 프랑스에서 니스 해변에 앉아 있는데 친구 둘이 음료수를 사러 갔다. 수영복을 입고 혼자 앉아 있는 내게 깊은 눈, 하얀 피부, 훤칠한 키의 프랑스 남자가 다가왔다. 아까부터 저쪽에 앉아 나를 흘끔거리던 남자다. 가슴이 뛰었다. 남자는 프랑스어로 뭐라고 말했다. 차라리 수줍게 미소나 지을 것을, 나는 대학 교양 수업 시간에 배운 하찮은 불어 실력을 총동원해 그 말이 “불 좀 있어요?”일 것이라 짐작을 했다. “노, 노노노노~” 불이 없다는 말도 당황하니까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머쓱해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해변을 떠날 때쯤에야 비로소 그가 한 말이 머릿속에 재생, 번역됐다. “잠시 시간 좀 있어요?” 울고 싶은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친구들이 씻는 동안 발코니에 나와 멍하게 서 있었다. 순간 맞은편 발코니에 서 있던 노인이 나에게 손짓을 하더니 옷을 홀랑 벗어던졌다. 그의 축 처진 알몸을 보며 생각했다. 이번 휴가도 망했구나.

춤추다 도망친 여자 / 마음만 밀회

일주일 동안 혼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갔다. 일 때문이었지만 마지막 하루는 휴가였다. 낯선 도시에서의 마지막 밤, 이대로 잠들 순 없다는 생각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호텔을 나섰다. ‘샌프란시스코 제일 물 좋은 클럽’을 검색했다. 화끈하게 놀아보리라, 다짐했다. 입구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잠시 줄 서 있는데 바로 앞에 혼자 서 있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다른 도시에 사는 변호사라는 그도 오늘이 출장 마지막 밤이라 했다. 함께 들어가 춤을 추는데 춤이 ‘범생이’ 스타일. 그런데 이 남자, 내게 ‘부비부비’를 시도하는 모든 남자를 막아선다. 술과 춤에 취한 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어깨, 팔, 허리….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도 나도 각자 호텔방이 있고 밤은 깊을 대로 깊었다. 슬쩍 결혼반지를 빼서 가방에 넣었다. 그런데 손가락의 반지 자국이 나를 너무 불편하게 한다.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남자에게 말하고 입구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무대 위의 그가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거리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벌써 다 놀았어요?” 택시 기사가 묻기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답했다.

자꾸 마주친 것은 운명일까 / 운명을 믿는 여행자

혼자 한달 동안 인도 여행을 갔다. 주로 버스로 이동을 했는데 며칠씩 차를 타기도 했다. 버스가 휴게소에 들렀을 때 흙먼지 속에서 누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일본인인 그는 내게 영어로 말을 걸며 음료수를 건넸다. 그는 인도 여행이 두번째라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버스에 탔다. 버스 안에서도 그의 시선이 신경쓰였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한 뒤 우리는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하지만 제법 넓은 도시에서 우리는 하루 동안 세번이나 마주쳤다. 마지막에 마주쳤을 때 머쓱하게 웃는 내게 그는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다. 운명인가? 그날부터 우리는 함께 숙소를 잡고 남은 여행을 함께했다. 뜨거운 사랑의 시작일 거라, 그땐 그렇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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