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0.15 20:33
수정 : 2014.10.15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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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비에스 채널 방영 프로그램 <등산녀>.
누리집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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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아리카와 마유미의 요즘 여자
일본 문화를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말이 ‘마니아’ 문화다. 특정 분야를 전문가보다 더 정통하게 꿰고 있는 극마니아를 지칭하는 ‘오타쿠’에 해당하는 부류는 주로 10, 20대 남성들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20, 30대 독신여성들이 마니아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마니아 여성’ 생태계를 이루는 여자들은 다양하다. 등산을 즐기는 ‘산걸’(야마걸), 역사에 정통한 ‘역사녀’(레키조), 불상 감상이나 좌선, 설법 등의 불교에 빠진 ‘불녀’(부쓰조), 철도에 관심이 많은 ‘철도녀’(데쓰코), 낚시를 좋아하는 ‘낚시걸’(쓰리걸), 달리기를 사랑하는 ‘러닝걸’(런걸), 별이나 우주를 탐구하는 ‘하늘걸’(소라걸), 자전거를 아끼는 ‘사이클링걸’ 등 취미의 개수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마니아 여성들이다.
남자는 마니아라고 하면 어쩐지 괴짜 같은 느낌이 강하지만 여자 마니아는 좀더 화려하고 사교적인 느낌이 강하다. ‘산걸’은 산악계가 아니더라도 패션계를 주도하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산걸의 대표적인 스타일이 레깅스에 반바지를 입는 차림인데, 설령 동네를 걷고 있더라도 활동적인 여성으로 보일 수 있는 패션이다. 내가 아는 한 ‘산걸’은 요즘 “국내 산을 다니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해외까지 진출했습니다”라며 에스엔에스에 외국의 내로라하는 산을 오르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하나씩 올리고 있다. 그 글에 달리는 댓글만 보아도 패셔너블하고 귀여운 그 산걸은 도시에 여자친구를 남겨두고 혼자 산으로 떠나야 했던 남성들의 로망임을 짐작할 수 있다. ‘불녀’는 주말이면 현역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사찰음식을 맛볼 수도 있으며 독경·설법도 할 수 있는 ‘스님바’에 가거나 절을 찾아다닌다. 이들을 위한 ‘불녀 신문’까지 발행되고 있다. 그녀들이 주로 세우는 목표는 일본 시코쿠섬의 1200킬로미터, 88개의 순례길 ‘오헨로’를 모두 걷는 것이다. ‘철도녀’가 되려면 일본의 수많은 철도 종류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야 하며, 철도 상품 및 철도역 주변의 맛집을 모조리 섭렵하는 과외 활동까지 소화해야 한다. 마니아 여성 몇몇은 엄청난 취미생활 덕분에 이름과 얼굴을 알리고 연예계에 데뷔하는 ‘취미 탤런트’가 되기도 했다.
과거 20, 30대 여성들은, 취미에 빠질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 나이대 여자들이라면 대부분 가사와 육아에 바쁘고, 자기 이외의 사람을 돌보는 것으로 녹초가 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결혼이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이며, 연애에도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면? 직업적으로도 더이상 스펙을 높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타인으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홀로 계획을 세우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취미’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 총무성의 전국소비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30살 미만의 근로자를 기준으로 할 때 여성의 소득이 남성을 앞질렀다.
그런데 그런 이유뿐일까. 사회학자 야마다 마사히로는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부모와 동거하면서 기초적인 생활 조건을 부모에게 의존하는 미혼자를 기생충에 비유한 ‘패러사이트 싱글’이라는 말을 탄생시켰다. 그는 친밀한 가족이 없는 싱글을 가리켜 ‘가족 난민’이라고 부른다. ‘난민’은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안정되게 살 수 있는 곳을 구하고 있음에도 그 장소를 확보하지 못하고 떠돌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부모나 배우자와 살고 있어도 친밀한 공동체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진정한 가족을 찾고 있을 경우는 ‘가족 난민’인 것이다.
마니아 여성들은 열중할 대상, 취미로 교류할 수 있는 동료를 통해서 심리적인 피난처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만약 ‘가족 난민’이 장기화되고 더 확대된다면 어떻게 될까. 앞으론 ‘봉사걸’(볼런티어걸), ‘사회공헌걸’ 같은 마니아 여성이 나올 수도 있겠다.
아리카와 마유미 작가·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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