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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그늘을 밟고 가는 길, 좁다란 갓길, 호숫가의 산책로에 터널길까지 1번 국도는 걷기 여행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변화무쌍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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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1번국도
불편해서 문득 더 아름다워지는 1번국도 걷기…백양사 원동마을~정읍, 여행자들이 뽑은 최고의 길
목포에서 임진각까지 자동차로 한나절이면 달릴 수 있는 1번 국도를 한달 가까이 걸려 갔다. 그들은 왜 걸었을까? 1번 국도가 지나가는 경기도 평택시 송탄에서 나고 자란 사진작가 신미식(53)은 사십대가 끝나기 전 1번 국도를 걷기로 결심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살아오면서 어쩐지 마음에 그 길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던 것 같았다. 2012년 어느 봄날 밤, 돌사진을 찍는 유명희(32)씨는 스튜디오 뒷방에서 그날 받은 일당을 헤아리다 문득 ‘만원짜리 몇장을 벌려고 언제까지 이렇게 악착같이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던 그에게 1번 국도는 더없이 어울리는 장소일 것 같았다. 그해 여름 그는 1번 국도를 종주했다.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책 <나는 걷는다>를 읽고 국토 종주를 시작했던 회사원 김부형(54)씨는 2번, 6번 국도를 걷고 자신감을 얻어 1번 국도에 도전했다. 지난해 1월 이현조(47) 시인은 하루 동안 천안에서 연기까지 1번 국도 23㎞ 구간을 걸었다. 작가회의가 벌인 ‘1번 국도 평화릴레이’에 참가한 길이었다. 이유가 달랐던 만큼 그들이 1번 국도를 걸었던 방식도 저마다 달랐다.
“너무 좋은 경치만 나오면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는데
1번국도는 소소하니까
마을풍경이 각별하게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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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국도를 걸어서 여행한 신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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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국도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길이다.” 2009년 10월27일 목포에서 파주로, 1번 국도를 걷기 시작한 신미식 작가는 이렇게 돌아본다. 자동차 전용도로로 바뀐 새 길과 긴 터널을 피해 신 작가는 1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면서 여러번 옆길로 빠졌다. “1번 국도 걷기는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나 구도다. 여기 가려면 스님들처럼 화두를 하나 가지고 가야 한다.” 김부형씨도 이렇게 말한다. 고행은 목포 시내 ‘국토 1번’을 알리는 표지석에서 시작된다. 거기서 목포 시내를 벗어날 때까지 10㎞. 원래 걷기 여행은 초반이 어려운데다 시내를 벗어날 때까지 떡바우 고개와 위아래 고개가 이어지며 가파른 경사가 계속된다. 걷기 여행자들이 ‘깔딱고개’라고 부르는 첫번째 시련이다. 그러나 걷기에는 고통만큼이나 환희도 각별하다. 전남 무안을 지나면 어느덧 길은 영산강과 나란히 흐른다. 영산강 근처 구진포엔 이제는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터널이 있다. 신 작가가 여행의 가장 인상적인 대목으로 꼽는 곳이다. 벽돌 하나하나가 오랜 세월을 빨아들인 폐터널에 머물렀다 가는 경험은 일제 때 상처를 간직한 1번 국도 걷기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장면이다.
1번 국도는 산길로 새기 좋은 길이다. 광주 무등산, 장성 백양산, 정읍 정읍사, 계룡 동학사를 일일이 들렀던 신 작가의 걷기 여행은 낙엽이 지기 시작한 계절에 시작해 한달 뒤 차가운 눈보라를 맞으며 끝났다. “처음엔 1번 국도를 밟다가 나중엔 자꾸 1번 국도를 벗어나 옛날 길들을 찾아갔다. 김장하는 아주머니들 만나고 감도 따먹으며 딴길로 새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그러다 탈나기도 한다. 백양사 갔다가 내장산까진 올라가지 말았어야 하는데 내장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정읍에서 며칠을 앓았다.” 신 작가의 경험담이다. 꼭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도 좋다. 논과 논 사이를 지나는 1번 길에는 유독 감나무가 많다. 철이 지나면 그냥 떨궈버리거나 남기는 감도 많기 때문에 1번 국도 가을 여행자들은 원없이 감을 먹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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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국도를 걸어서 여행한 김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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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형씨는 한번에 1번 국도를 걸은 게 아니라 2012년 5월부터 10월4일까지 목포~정읍, 정읍~계룡, 계룡~천안, 천안~임진각 4개의 구간을 3~4일씩 걸려 휴가나 연휴 때마다 걸었다. 보통 하루 20㎞를 걷는데 이미 2번, 6번 국도를 거친 그는 1년 동안엔 끝낼 요량으로 하루 40㎞를 목표로 잡고 걸었다. 중간중간 만나는 상인들과 마을 사람들은 보기 드문 1번 국도 종주자를 반갑게 대하며 과일과 물을 나눠주었다. “너무 좋은 경치만 나오면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는데 1번은 소소하니까 마을 풍경이 각별하게 와닿는다”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것이 길이다. 이현조 시인은 “원래도 사람이 드문 편이지만 눈 쌓인 겨울, 1번 국도는 사람 사는 집이 반갑고 설렌 곳”이라고 표현한다.
백양사 아래쪽 원동마을에서 정읍까지 가는 길은 걷기 여행자들이 꼽은 1번 국도 최고의 길이다. 닿을 듯 닿지 않던 영산강의 한 줄기를 여기서 만난다. 문순택 작가의 소설 <징소리>에 나오는 수몰 마을 방울재가 물속에 잠겨 있는 호수는 갈대 반, 물 반이다. 장성호 호숫가엔 올해 3월 임권택 시네마테크가 문을 열었지만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걷는 길은 주말에도 한산했다. 무심히 지나던 차들만 뜻하지 않는 풍경에 놀라 멈췄다 가곤 한다. 장성호 산책로에서 입암산과 방장산 사이를 지나는 1번 국도 고갯길을 가을재(갈재)라고도, 단풍고개라고도 부른다. 꼬불꼬불하지만 오르막은 얼마 되지 않아 둘레길을 걷는 듯 순한 길이다.
걷기 여행자들은 지친 발을 달랠 겸 찜질방에서 잠을 청한다. 그런데 찜질방이 가까운 1번 길은 충청도로 넘어가면서부터다. 남쪽은 다른 국도에 비해 주유소나 휴게소가 적기 때문에 자꾸 마을을 찾아들게 된다. 반면 계룡시에서 세종시로 가는 길은 공사를 많이 해서 밤엔 그 코스를 지나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동차 전용도로로 바뀌는 일부 구간에선 달려오는 차들이 아슬아슬하고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도 마땅치 않아 자칫 천안까지 가야 쉴 곳을 찾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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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국도를 걸어서 여행한 유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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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희씨는 2012년 7월24일 아침 10시에 목포에서 출발해 8월12일 임진각까지 총 20일 동안 1번 국도로만 다녔다고 한다. 처음엔 10㎞도 못 걸었지만 4~5일 지나면서부턴 다리가 가벼워져서 여행 끝날 무렵엔 하루 20㎞는 거뜬히 걸었다. “도로표지판에서 숫자 ‘1’만 확인하면 목포에서 임진각까지 갈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 알고 갔던 유씨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아예 잠도 1번 국도에 접한 마을에서 잘 곳을 구해 잤다.
해가 질 때가 되면 우선 마을에 들러 이장님 댁이나 마을회관에 잘 곳을 물어보았다고 한다. 세상에 대한 불신과 원망을 달래기 위해 출발한 여행은 전남 무안 태봉리 이장님 댁에서 자고 나주배박물관에서 배즙을 얻어 마시며 스르륵 풀리기 시작했다. 그가 쉴 곳을 찾는 비결은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면 웃으면서 눈을 맞추며 인사를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꼭 누군가는 물을 주고 더 쉬었다 가라고 붙잡았다”는 그의 행복한 여행은 사람 발을 많이 타지 않은 길이어서 가능했으리라는 짐작이다.
옷 두벌과 물병 2개만을 들고 무전여행을 한 이유는 “돈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다가가지 않는 자신을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1번 국도 여행에서는 세상으로부터 마음껏 얻어먹고 많이 받고 싶었다”는 소원은 이루어졌고, 1번 국도 여행은 온통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기억으로 채워졌다.
1번 국도는 누군가에겐 고행길로, 누군가에겐 소소한 길로, 누군가에겐 세상과 통하는 길로 기억된다. 1번 국도는 그런 길이다.
1번 국도/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신미식·유명희·김부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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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용 텐트를 자전거에 싣고 다니는 이부남씨가 1번국도 근처에 짐을 부려놓았다. 이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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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라면 4구간으로 나눠 달려보길
목포-장성-논산-송탄-임진각
서울 광진우체국에서 일하는 이부남(57)씨는 지난 8월8일 목포역에서 평택까지 1번 국도를 2박3일 자전거로 달렸다. 한동안 쉬었다가 10월11일엔 평택에서 수원까지를 다시 자전거로 달렸다. 1번 국도는 안양부터 자동차 전용도로이기 때문에 1번 국도를 자전거로 여행하려면 안양천 자전거길을 지나 성산대교를 건너 벽제, 파주, 문산으로 가야 한다. 국도가 넓어지면서 자전거를 위한 길은 자꾸 줄어든다. 네이버 카페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들’(cafe.naver.com/biketravelers/) 운영자인 정오진(54)씨는 “우리 카페 회원이 17만명이지만 1번 국도를 종주한 사람은 10명이 못 될 것”이라고 짐작한다. 7번 국도처럼 바닷가를 따라 달리거나 44번 국도처럼 미시령을 넘는 것도 아닌 내륙을 달리는 심심한 길쯤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7년 3박4일 동안 1번 국도를 다녀온 정오진씨는 “화물차가 유독 많은 2번 국도에 비하면 1번은 비교적 안전한 길”이라고 전한다. “다른 국도가 자동차 위주 길로 바뀌면서 갓길이 줄어든 데 비하면 1번 국도는 갓길 여유가 있는 편”이라고도 했다.
걷기 여행자들은 목포 시내 표지석에서 출발하는 데 비해 자전거 여행족들은 자전거를 보관해주는 목포 시내 한강건강랜드 찜질방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초보 자전거 여행자들은 보통 하루에 60~80㎞를 달리고, 국도 경험자들은 하루 120㎞를 넘게 달린다.
정오진씨는 목포~백양사 앞 사거리, 장성~논산, 논산~송탄, 그리고 경기에서 임진각까지 네 구간으로 나눠 달리는 것이 적당하다고 권한다. 숙소를 따로 찾지 않고 도로 근처에 텐트를 치는 이부남씨는 15㎏ 정도의 짐을 싣고 달리는 탓에 그보다 속도는 훨씬 느리지만 구간은 대체로 비슷하다. 숙소 찾는 시간을 달리는 데 쓰기 때문이다. 이부남씨가 자전거에 싣고 달리는 짐은 물통 2개와 침낭, 1인용 텐트와 12만분의 1 축척 지도가 전부다. 그는 “기본적으로 숙소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까 동선이 자유롭고, 무거운 짐을 싣고 달리는 만큼 근력이 커지기 때문”이라고 자전거 캠핑을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걸어서 지난 길과 자전거로 달린 1번 국도는 어떻게 다를까? 정오진씨는 “자전거는 속도가 지배하기 때문에 혼자 가면 끝까지 혼자 오기 쉽다”면서도 “그래도 국도는 자동차길과는 다르다. 저수지, 논, 밭, 마을 사람들, 별의별 걸 다 만난다”고 했다. 이부남씨는 “느린 여행이라지만 시속 30㎞, 속도의 흥분이 지배한다. 말을 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이 되어 달린 기분”이라고 했다.
남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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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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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간은 주의하세요
■ 장성~정읍은 2차선이 남아 있는 곳으로 옛길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지만 원덕리에서 정읍까지 부분부분 도로공사 중이라서 주의해야 한다. 공사 중인 길 옆으로 옛길을 따라갈 수 있다.
■ 전주~삼례·금마 구간이 자동차 전용도로로 바뀌면서 자전거와 사람은 지날 수 없게 됐다. 전주역을 찾아 들어가 북쪽으로 나오는 길을 택해야 한다.
■ 계룡시에서 공주시로 가는 길은 3.3㎞ 길이의 계룡1·2터널로 바뀌었다. 자전거는 지나갈 수 없고 무심코 들어간 도보여행자들은 지옥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새 길은 청사 중심, 옛길은 기차역 중심이다. 계룡시에서부터 1번 국도로 가지 말고 서대전역으로 가는 1번 국도 옛길을 물어보는 것이 좋다.
■ 1번 국도를 따라 세종시로 진입하는 도로는 지하터널로 새로 만들어졌다. 표지판만 보고 가다가는 세종시를 지하도로 지나가기 십상이다. 여행객들은 진입 교차로에서 세종시 대평리(대평동)에서 대전 유성(반석동)으로 가는 자전거 전용도로를 찾거나 지하도 위쪽 1번 국도 옛길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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