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0.29 20:30
수정 : 2014.10.30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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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피운 석쇠 위에 대하, 조개, 전어 등을 올려놓고 와인 한잔이면 만찬 준비 끝이다. 사진 손현주/푸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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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요리
대하, 꽃게, 생굴, 주꾸미, 해삼 등 제철 해산물 지천인 안면도의 가을 맛 편지
“요즘 것들 게을러서 그렇지, 옛날부터 이 섬에서는 밭 한 뙈기 없어도 호미만 있으면 굶지 않는다고 했어. 바다로 나가면 널린 것이 ‘돈’인데…”
노인의 말처럼 안면도는 ‘살 만하다’. 아니 과거에도 살 만했다. 오일장을 도는 장돌림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할머니들 씀씀이가 내포 쪽에서 으뜸이라고. 섬사람들은 농사가 팔 할이나 땅보다 더 쏠쏠한 ‘황금바다’가 있었다. 사리 때 네댓시간 갯벌을 뒤지면 10만원, 20만원 버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사철 바지락과 겨울 굴, 밤바다를 누비는 해리질(사리 때 물이 깊게 빠지면 해산물을 줍는 일)까지 노인들 주머니는 지폐가 마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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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면 드르니항과 백사장항을 잇는 안면도 저녁놀 새 명소 꽃게다리. 사진 손현주/푸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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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요의 섬’ 안면도 늦가을은 먹을거리가 지천이다. 손바닥만한 대하가 여전히 나오고 등딱지 딱딱해진 꽃게는 살이 야무지게 차올랐다. 가을낙지가 시장에 나왔다. 속 탱글탱글한 홍합과 바다 향 가득한 생굴이 식욕을 자극하고, 뚝뚝 썰어내 오독오독 즐기는 해삼이 제철이다. 낚싯대에 살살 올라오는 주꾸미, 망둥이까지 모조리 안줏감이니 섬은 날마다 술에 취한다. 해장이야 늙은 아내가 끓여내는 바지락 탕이면 되고, 지척 텃밭에서 나온 무며 배추가 맛이 들었으니 모자랄 것이 없다. 막 캐낸 고구마와 늙은 호박이 허청(헛간으로 된 집채)을 채운다.
이맘때쯤 잘 익었으며, 곰삭은 재료들이 어우러져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게국지가 탄생한다. 섬사람들은 사철 게장을 먹는다. 4월에 장이 노랗게 밴 꽃게에서부터 시작해 박하지(돌게), 농게, 칠게 등으로 연중 밥도둑을 만들어낸다. 간장은 버리지 않고 계속 달여(식혀) 붓는다. 이 간장이 게국지의 핵심이다. ‘다라이’에 갈배추나 시래기를 담고 늙은 호박을 먹기 좋게 썰어 넣는다. 거칠게 빻은 시퍼런 끝물고추에 갖은 양념을 하는데, 이때 1년 묵은 게국으로 간을 맞춘다. 사나흘 뒤 김치에 간이 배면 아궁이 잔불에 바글바글 지져 먹던 것이 전통 게국지다. 삭힌 간장의 짜고 쿰쿰한 맛이 독특한 풍미를 자아낸다. 하지만 지금은 묵은 게국 구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식당들마다 꽃게, 대하 등 갖은 해물을 넣고 지져내는 통에 딱히 어떤 맛이라고 규정짓기가 어려워졌다.
갈배추·시래기·늙은 호박에
게장의 곰삭은 간장 넣고
바글바글 지져 먹는 게국지
찬바람에 말린 우럭
쌀뜨물에 끓인 우럭젓국 별미
우럭젓국도 안면도 별미다. 막소금 얹어 찬바람에 사나흘 말린 우럭을 쌀뜨물로 폭 끓여낸 것이 우럭젓국이다. 본래는 제사음식이다. 쪄서 상에 올렸던 것을 음복하면서 살점은 뜯어 먹고 남은 대가리와 뼈를 뽀얗게 끓여내던 것이다. 구수하고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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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철 갈배추에 1년 묵은 게국으로 간을 해 만든 태안 토속음식 게국지. 사진 손현주/푸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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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분간할 수 없는 해무가 섬을 휘감았다. 오전은 홀로 계신 친정어머니와 함께 단감을 따냈다. 해거름에 바다로 나오니 만조다. 계단을 차곡차곡 밟고 올라온 바닷물이 방조제 목젖까지 닿았다. 느리게, 들개처럼 포구를 어슬렁거리고 싶어지는 시간이다. 아, 촐촐하다. 누군가 말 걸어주고, 그러다 그리움이 실타래처럼 풀리면 불 피우자고 할 분위기다. 생선을 툭툭 던져 노릇노릇 굽게 되면, 정신없이 막걸리 잔이 채워질 망망대해 같은 시간이 바로 이 무렵, 어스름 아닌가. 어제도 마시고 그제도 마셨지만 갈증은 어찌 그리 날마다 이는지, 중선 배 끄는 까까머리 동창이라도 마주치면 술 마실 궁리는 폭죽처럼 터진다. 낙지발처럼 들러붙는다.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더니만, 오늘도 그럭저럭 술꾼이 모아졌다. 어쩌다 생긴 화이트와인이 있으니 분위기를 잡자고 했다. 양동이 들고 포구에 들러 몇 가지 해물을 주워 담았다. ‘날도 좋으니 바닷가로 가자.’ 카센터집 부부는 사리였던 간밤에 해리질한 무용담을 털어놓느라 정신이 없다. “망둥어만 뚝 따먹고 들어가는 것은 큰 놈들이야. 그래도 어젠 잘 붙었어. 열 마리는 족히 잡았으니 내일 우리 집으로 모여. 참, 영두 아빠는 유사장네 들러 박 한 덩어리 들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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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 꽃게는 살이 야무지게 차올랐다. 사진 손현주/푸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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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게 현지인들만 들락거리는 회목 해변. 잡도리 잘 하고 장작불을 피운다. 화르르 겉불이 꺼지고 묵지근한 속불이 올라왔을 때 생선을 얹어야 태우지 않고 노릇노릇 구워낼 수 있다. 매운 연기가 가늘게 웃음소리처럼 번진다. 도구래야 석쇠와 젓가락뿐이다. 대하가 분홍색으로 몸을 뒤틀고 소라며 가리비, 뒤웅조개(뒤웅박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연륙교 아래서 잠수부들이 잡는다)가 입을 쩍쩍 벌린다. 던져놓은 전어에서 단내가 난다. 전어는 부러 얼렸던 것을 구했다. 그래야 구우면서 살이 석쇠에 붙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읊어내는 ‘햐, 좋다. 가을이 다 지나갔어’ 하는 시절 한탄이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불가에 쪼그리고 앉아 조금은 쌀쌀한 가을 한 토막을 보내는 일은 제법 낭만적이다.
섬 중년들이 뭔가 익히기 위해 불을 피우는 것은 일종의 ‘의식’이다. 귀찮고 맵고 눈물 나지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는 사람들을 과거의 시간으로 유인하기 때문이다. 개구리를 통째로 불에 얹어 뒷다리 쑥 뽑아 먹던 유년 기억부터, 하지감자를 모깃불에 숨겨두고 이즈막 서리해 온 콩대를 불더미에 던지는 일은 다반사였으며 밤과 고구마, 벼이삭까지 구워 먹던 시간들이 하늘로 높게 치솟아 오른다. 특히 섬 아이들은 금방 들어온 배를 배회하며 얻어낸 해물들로 허기를 채웠다. 바다 모퉁이 바람 닿지 않는 곳을 아지트 삼아 불을 피웠는데,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데는 굽기보다 재밌는 일이 없다는 것을 유전처럼 습득했으니까.
나직하게 내려앉은 가을의 저음과 파도 소리, 두런두런 사람 소리, 그리고 간간이 터지는 웃음소리. 하니 인생 2막을 섬마을에서 산다는 것은 괜찮은 선택이다. 그러다가 섬도 ‘그 바다’로 연결되어 있는지라 서로 말을 아꼈으나, 지난 4월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했다. 누구는 바닷물에 발목을 못 적시겠다고 했고, 누구는 당분간 회를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물이 빠지는 중이다. 바다는 여전히 섬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그렇게 흘러나간다. 흘러, 다시 그 아픈 바다에서 합수할 것이니 술잔은 다시 비워진다. 귀향 5년째인 내 일상에서 섬의 풍요가 올처럼 아팠던 적은 없었다.
손현주/푸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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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럭젓국. 사진 손현주/푸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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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솔밭가든’(041-673-2034), ‘곰섬나루’(남면 041-675-5527, 점심 예약제)가 게국지와 우럭젓국(사진)을 잘 끓여낸다. 안면도 연륙교 근처 백사장항이나 읍내 시장을 가면 제철 해산물을 구입할 수 있다. 방포항 ‘방포수산’(041-673-4575)은 채소 값만 내면 선택한 해물을 즉석에서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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