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1.12 20:52
수정 : 2014.11.13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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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이혼을 위한 첫번째 단계는 책장을 분류하는 것이다. 책을 정리하기 전에 칸을 비워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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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라이프
교육 컨설턴트 김승씨에게 조언 받아 집안 책장 정리하기
심각하게 이혼을 고려하고 있다. 헤어지는 쪽으로 거의 마음을 정하고 나니 10년 넘도록 치열하게 벌여온 싸움이 눈에 밟힌다. 신혼집에 각자의 살림을 부려놓았을 때 겹치는 책이 여럿 나왔다. 그땐 책에 대한 남편의 애착과 세세한 추억담에 압도당한 나머지 내 책이 주로 버려졌다. 그 뒤 이사할 때마다 찾아오는 전투에선 달랐다. 겹치는 책은 더는 없었지만 집 넓이에 넘치는 책은 늘 싸움거리였다. 남편은 그사이 책에 대한 개인사뿐 아니라 이 책이 우리 집에 존재해야 할 사회적 이유까지 보태 무장했고, 나는 그가 책을 사놓곤 상당수 읽지 않았다는 근거로 창을 들었다. 나는 쓰지 않는 물건은 무조건 버리는 실용적 인간이지만 남편은 요지부동 옛책을 사수하는 전사였다. 지금 사는 집으로 서재를 넓혀 이사온 지 3년이 지나자 책장은 다시 터질 듯했고 갈 자리를 못 찾은 책들은 책장 앞, 책상 밑, 문 뒤까지 점령했다. 내가 지금 정리하기로 결심한 대상은 남편이 아니라 남편의 서재다. 교육 전문가이면서 책 <베이스 캠프: 지식세대를 위한 서재 컨설팅>(미디어숲 펴냄)을 쓴 김승씨의 조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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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 컨설턴트의 도움을 받아 책장마다 주제어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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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서재 컨설턴트를 기다리면서 우리 집에 책이 몇권이나 되는지 세어보았다. 서재에 있는 것만 얼추 950권쯤 됐다. 여기에 1990년대 초반부터 모아온 정기간행물 500권쯤을 더해야 한다. 우리는 방 두면을 가득 채워 책장을 짜넣고 한쪽은 어른 책, 다른 한쪽은 아이 책과 정기간행물, 문서를 보관한다. 부지런히 주워오고 얻어온 탓에 8살 아이 책도 400권 정도 된다. 남편의 취미는 중요한 사건이 담긴 신문이나 잡지를 모아두는 것이고, 특기는 자신이 만들었던 문서를 모두 파일로 만들어서 정리하는 것인데 파일을 한줄로 쌓으면 대략 4m 높이쯤 될 것 같았다. 서재 컨설턴트가 와서 속 시원하게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리라고 책장을 쓸어내는 장면을 상상하며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 집에 들어선 김승씨는 첫마디부터 내 기대를 저버렸다. “아름답네요. 참 환상적인 서재입니다.” 기업과 대학에서 주로 강의하고 컨설팅하는 그에겐 보기 드문 인문학적 서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컨설턴트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우리가 지금까지 책 때문에 얼마나 싸웠는지 구구절절 일러바쳤다. 나는 직업상 매달 10권 넘는 책이 새로 들어오고 읽어야 하는데 들일 자리가 없어서 읽자마자 버리거나 기증했다가, 나중에 기사를 쓰느라 다시 필요해져 새로 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좋아하는 작가의 전집이나 주제를 완성하는 길을 꾸준히 가고 있었고 나는 남편 몰래 누렇게 변한 그의 책을 조금씩 버리면서 마음을 달랬다. 김승씨는 “신경숙 작가처럼 자기 세계가 뚜렷한 서재들은 아예 처음부터 다른 사람과 결혼해도 서재 결혼식은 하지 않는다”며 “이 집 남편은 서재에서 역사성을 중시하는 사람인 데 비해 부인은 생산성이 우선인 사람이라 합치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금 이 집에서 당장 보지 않는 책들을 모두 정리하고 색깔과 주제별로 깔끔히 정리한다면 보기 좋기야 하겠지만 그것은 어떤 사람의 역사나 의미가 채워진 책장이 아니라 형식미만 넘쳐나는 책장이 될 것”이라는 말엔 반박하기 어려웠다.
결혼하면 서재 합치는 재미
10년 넘으면 슬슬 분리해가기
가족의 지적 독립으로 수용·존중을
책장 칸마다 주제 정해 나눠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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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씨는 작업실에 책장을 지그재그 모양으로 두고 도서관처럼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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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갈수록 창고가 되어가는 우리 집 서재를 구할 방법은 무엇인가? 김승씨의 제안은 먼저 “나에게 서재란 무엇인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이유를 확인하라”는 것이다. 지식의 역사를 소중히 여긴다면 보존해야 한다. 작업실이라면 읽고선 버리는 게 맞다. 알고 보니 김승씨도 무지막지한 간서치, 책만 보는 바보였다. 그는 몇해 전 경영 컨설턴트로 독립하면서 가지고 있던 1만2000권의 책을 품은 작업실을 따로 차렸다. 그는 “구글이 세상의 모든 책을 다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도 종이라는 물성을 지닌 책의 지혜와 통찰은 절대 디비(DB)화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국출판인협회 통계자료에 따르면 매월 새로 나오는 책이 3500권. 매일 120권의 책이 새로 쏟아지는데 지난 책을 다시 보긴 쉽지 않다. 그는 현관 앞에 신간만 모은 책장을 따로 세웠다고 했다. 그는 우리 집에도 읽거나, 버리거나, 줄 책 등 책의 운명이 정해질 때까지 두는 새 책 칸을 따로 마련할 것을 제안했다. 새로운 정보·지식이 중요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아예 북코스모스(www.bookcosmos.com) 같은 책 내용 요약서비스 업체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다만 이런 서비스도 자신이 이 책을 읽었다고 착각하는 데 쓸 것이 아니라 어떤 책을 읽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용도로만 써야 한다. 어떠한 전자책도 종이책과 나누는 경험을 안겨주긴 어렵기 때문이다.
또 그는 “사람들에게 서재를 보여주면 평수를 계산하고, 지식을 논하면 언제 읽는지 시간만 물어본다”며 “계속 책과 함께하길 소망한다면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이 자신만의 기준으로 책을 분류하는 것”이라고 했다. 김승씨가 즐겨쓰는 방법은 책장 칸마다 주제어를 붙이는 것이다. 서재가 쉼터라면 “절망할 때/ 막막할 때/ 단절감에 시달릴 때/ 메마를 때 읽는 책”처럼 정서적인 주제어를 붙일 수 있고 시간에 쫓긴다면 “고전/ 감성/ 희망/ 터닝포인트/ 읽는 중/ 휴가 때 읽을 책”처럼 실용적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책장 주제를 정해두면 이 책을 두어야 할지 없애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이다.
정히 물리적으로 공간이 부족하다면 요즘엔 서재 벽만 책으로 두르는 것이 아니라 책장을 서로 등을 맞대 방 한가운데 두는 집이 늘어나고 있다고 귀띔했다. 아예 무슨 책이 있는지 목록을 만들고 도서관에서 쓰는 북카트를 사서 책장 사이를 돌며 읽고 싶은 책을 빼서 읽는 사람도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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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씨는 작업실에 책장을 지그재그 모양으로 두고 도서관처럼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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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컨설턴트가 우리 집을 두고 제안한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책장 칸마다 주제를 정하고 이름을 붙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장이 서재를 벗어나도 좋겠다는 것이다. 남편을 위한 서재를 따로 차려준다면 더 이상 성격이 다른 둘이 책 때문에 싸우지 않아도 된다. 김승씨는 “보통 결혼하면 서재를 합쳤다가도 10년이 넘으면 각자 서재를 따로 차리는 시기가 온다”며 “남자는 본래 자신만의 동굴을 중시하고 아이는 클수록 자신의 지적 세계를 스스로 구성하는 때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가족의 진화에 따라 서재는 결혼했다가도 이혼하는 게 맞다. 서재 독립을 가족의 지적 독립선언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 책을 처음 우리 서재에 들여놓았을 때 남편의 반대가 심했던 게 기억이 났다.
그날 저녁 자신의 책이 모두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뻐하는 남편과 봄이 되면 거실 한구석에 남편 책장을 마련하기로 했다. 아이는 어른 책장에 붙은 주제어를 보고선 자신의 책장에도 붙이기 시작했다. 아이가 붙인 주제어는 이렇다. “114/ABCD…” 114는 궁금한 게 있을 때면 찾아보는 책들 모음이고, ABCD는 당장은 안 읽지만 앞으로 크면 읽어야 할 것 같은 책들이란다. 고전/ 과학/ 창작 식으로 엄마가 분류해놓은 책들은 완전히 아이 마음대로 새로 꽂혔다. 봄이 되면 아무래도 우리 가족은, 우리 가족의 책장은 헤어지게 될 것 같다.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김승 컨설턴트 제공
김승 컨설턴트의 아이책 정리법
1 책장 고르기 아이 책은 어른 책보다 무겁기 때문에 튼튼한 책장을 골라야 한다. 칸막이 두께는 최소 30㎜는 넘어야 한다. 5줄에 3칸씩 나뉜 책장이 가장 권할 만하다. 이런 책장은 보통 한칸에 20권씩 들어가니까 책이 얼마나 있는지 헤아리기도 쉽다.
2 책장 분류 부모 책을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고 아이 책장은 아이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초등학교 3학년만 되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책과 공부하려면 읽어야 할 책을 구분해 정리할 수 있다. 더 세세한 분류를 하도록 이 책의 의미는 너에게 무엇인지 자꾸 질문하는 것은 좋다.
3 전자책 대 종이책 초등학교 교과서로 곧 전자책이 들어올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부모와 함께 태블릿을 활용한 전자책 독서를 해볼 필요는 있다. 다만 종이 책장을 넘기는 손맛을 잊지 않도록 종이책 쪽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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