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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5일 오후, 제설작업이 한창인 횡성 웰리힐리리조트 스키장 슬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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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포슬포슬 눈, 한 슬로프 하실래예~
변덕스런 겨울 날씨와 싸우는 스노맨 24시
스키철이 시작됐다. 지난 주말 전국 14개 스키장들이 일제히 운영에 들어갔다. 이달 중순부턴 터레인파크·하프파이프 등 모험심이 강한 보더들을 위한 시설들도 가동될 전망이다. 강원 산간지역 스키장들은 이미 지난 11월 중순부터 일부 슬로프를 개방한 바 있다. 11월 중순~말엔 눈다운 눈 한번 내리지 않고, 한낮 기온도 영상권에 머물렀던 시기다. 따뜻한 날씨로 ‘철 모르는’ 꽃들까지 피어나던 시기에, 어떻게 수백m 길이의 눈밭 슬로프를 만들고 운영할 수 있었을까. 밤낮으로 쉴 틈 없이 눈을 만들어 뿌려댄 ‘스노맨’들 덕분이다. 이들이, 기온이 영하권에 머무는 한밤중, 수십·수백대의 제설(製雪) 장비를 가동해 눈을 퍼부어 쌓고, 정설 차량으로 쌓인 눈을 펴고 다지고 다듬어 슬로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추울수록 일할 맛 나고, 따뜻할수록 가슴이 타들어간다는 ‘눈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 스키장들의 눈 밑 속사정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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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닉스파크 박영태 제설장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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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습도 맞아떨어져야 제설기 가동
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지난주 서해안을 덮은 폭설은, 시베리아기단의 찬 공기와 서해바다 수증기가 만나며 만들어졌다. 화창했지만 기온이 뚝 떨어졌던 덕에 내륙 산간 스키장들에도 최상급 설질(눈의 품질)의 풍족한 눈이 뿌려졌다. 차가운 공기와 물로 만들어낸 인공 눈이다.
‘눈 만들기’는 스키장의 알파요 오메가다. 스키장을 굴러가게 하는 힘이다. “10월 말이면 비상근무 체제로 돌입합니다. 하루라도 (다른 스키장보다) 먼저 슬로프를 만들기 위해, 장비를 점검하고 기온·습도를 수시로 체크하죠.”(휘닉스파크 박영태 제설장비과장·사진) 스키장마다 10~20명씩 조를 짜(계절 계약직 포함) 하루 12시간씩 교대로 제설·정설 작업에 나선다.
조건만 맞으면, 낮이건 밤이건 즉각 제설기를 가동한다. 조건이란 기온과 습도다. 기온만 낮다고 되는 게 아니다. 습도가 함께 낮아야 한다. 대기 중 물 입자가 많으면 냉각 온도가 높아져 눈이 잘 안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10여년 전까지는 습도는 따지지 않고, 영하 3도 밑으로 내려가야 제설기를 가동했지만, 요즘은 기온과 습도를 따져 냉각점을 계산하는 습구온도계를 이용해 제설 ‘스타트 시점’을 파악한다.
제설 경력 18년째인 대명 비발디파크 장비관리팀 조승열 과장은 “요즘은 기온이 섭씨 영하 1도에 습도가 60% 정도면 스타트(제설기 가동)가 된다”며 “습도가 30% 이하가 유지되면 섭씨 0도~영상 1도에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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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설이 완료된 슬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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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프 한 면 유지·관리에 물 2만~4만t 소요
맨땅의 슬로프 하나를 눈으로 덮어 스키를 탈 수 있도록 하려면, 이런 알맞은 조건이 유지된다는 가정 아래서도 2~3일 밤낮이 꼬박 걸린다. 보통 30~60㎝ 두께로 덮는데, 경사가 심한 상급자 코스 상단엔 1~1.5m 두께로 눈을 쏟아붓는다. 눈이 밀려 내려오는 걸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눈을 만들기 위한 또다른 조건이 물과 전력의 원활한 공급이다. 시즌 초기 오픈(슬로프 3~4개 면)에만 7만~8만t의 물이 들어간다. 한 시즌 슬로프 하나에 대략 2만~4만t의 물이 필요하다. 전기료는 하루에만 수백만원씩 든다. 이에 따라 제설팀에선 미리 계곡물을 가둬 물을 비축해두고, 전기는 비용이 싼 심야전기를 주로 이용한다. 지난 시즌(2013~14년) 휘닉스파크의 경우 눈을 만드는 데 쓴 물의 양은 모두 45만4630t이었다. 눈을 만들어 슬로프에 뿌리면 바로 스키를 탈 수 있을까. 아니다. 슬로프 만들기는 이제부터다.
10월 말이면 비상근무 돌입
제설기로 뿌린 눈 옮겨
밤새도록 평평하게 펴
기온 상승해 울퉁불퉁해진 ‘감자밭’
경사 심한 상급자 코스
다지기가 가장 까다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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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은(51·곤지암리조트 제설관리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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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설작업 최대한 빠르고 고르게 포슬포슬하게
“최대한 빨리, 최대한 고르고 균등하게, 최대한 자연설에 가깝게 만드는 게 핵심입니다.” ‘정설의 정석’ ‘정설의 달인’ 등으로 불리는, 제설·정설 경력 26년의 김성은(51·곤지암리조트 제설관리 책임·사진)씨의 말이다. 제설기가 만들어낸 인공 눈은 한곳에 집중적으로 쌓여 있기도 하고, 바람의 영향으로 여기저기 두께가 다른 눈더미를 만들어낸다. 이걸 하룻밤 사이, 또는 반나절 사이에 정설 차량(스노비이클)을 이용해 옮기고 펴고 다지는 게 정설 팀의 일이다.
“차량 앞에 달린 무쇠 삽날은 눈더미를 옮기거나 쌓는 데 쓰고, 뒷부분의 ‘틸러’는 눈 덩어리를 부수고 뒤집어 섞는 데 사용합니다.” 김씨는 “눈더미 쌓인 걸 보면, 차량을 몇번 움직여야 하는지 답이 나온다”고 했다. 보통 작업자가 서너번 차를 전진·후진시키며 하는 일을 그는 한번에 해치운다는 숙련자다. 삽날의 높이를 조정해, 눈 두께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게 관건이다. 눈을 옮겨 고르게 편 뒤엔 눈을 다지면서 표면의 눈을 뒤섞어줘야 자연설 같은 포슬포슬한 눈밭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잘 정비된 슬로프엔 정설 차량의 뒷부분에 달린 틸러에 의해 빗살무늬가 그려진다. 스키 자국, 발자국 하나 없이 빗살무늬가 그어진 깨끗한 슬로프는 모든 스키어들의 꿈이다. 일부 스키어들이 이른바 ‘땡 스키’(슬로프 개장하자마자 슬로프를 타는 일)를 즐기기 위해 개장일 새벽부터 줄을 서는 이유다.
정설 작업은 제설 뒤는 물론, 자연설이 쌓인 뒤에도 수시로 해야 한다. 가장 힘든 일이, 상급자 코스 작업과 기온이 상승해 이른바 ‘감자밭’(눈이 녹아 일부 흙이 드러나고 습한 눈 덩어리가 만들어진 슬로프)이 됐을 때의 작업이다. 무게 10t이나 되는 정설차로 슬로프를 오르내릴 때 미끄러져 위험해질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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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닉스파크의 슬로프 정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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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밭’ 됐을 때 가장 힘들어
슬로프 제설·정설에 동원되는 장비는 어떤 것들일까. 눈을 만드는 제설기는 대체로 건형과 팬형으로 나뉜다. 스키장들은 대개 수십대에서 100~200대에 이르는 제설기를 갖추고 있다. 총 모양으로 생긴 건형은 중앙기계실에서 배관을 통해 물과 공기를 공급받아 분사하는 방식이고, 팬형은 물은 공급받지만 자체 팬으로 공기를 섞어 분사하는 방식이다. 건형은 대당 1000만원 안팎, 팬형은 4000만~8000만원가량이다. 최근엔 눈 생산량이 많은 팬형을 선호한다고 한다. 무게 9~10t에 이르는 정설차는 값도 엄청나다. 4억~5억원대가 대부분으로 독일·이탈리아제가 선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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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형 제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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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안전한 슬로프, 자연설에 가까운 설질을 위한 스키장들의 제설·정설 경쟁은 해마다 치열해지고 있다. 2018년 평창겨울올림픽을 앞두고 겨울 레저스포츠의 관심이 커지는 상황이어서 더욱 그렇다. 대명비발디파크는 이번 시즌 개장 때 실내스키장들에서 사용하는 제빙 설비를 3대 새로 들여와, 개장 시기를 대폭 앞당겼다. 제빙기를 쓰면 기온에 관계없이 입자 굵은 눈을 미리 만들어 깔 수 있어, 제설 기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용평리조트는 올 시즌부터 슬로프마다 정설 담당자의 실명을 내걸고 설질을 관리하는 ‘정설 실명제’를 도입했다. 누적 강설량이 부족한 우리나라 스키장 환경에서, 한발 빠른 제설과 한걸음 더 나아간 정설 작업, 그리고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눈의 품질의 중요성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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