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2.31 20:22
수정 : 2014.12.31 20:22
|
임태병 사이건축 소장. 사진 남은주 기자
|
[매거진 esc] 건축가 임태병의 2015년 프로젝트
일년에 제사를 20번도 넘게 치르는 집에서 내 정체성은 ‘집안의 장손’이었다. 그런데 서울 홍대 앞에서 친구들과 비하인드라는 카페를 오랫동안 동업하면서 가족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가끔은 집이 지방인 친구들에게 방 한칸을 빌려주기도 했는데 핏줄로 얽혔지만 집안 행사 말고는 나눌 게 많지 않은 ‘가족’보다는 함께 밥을 먹고 일상을 공유하는 ‘식구’가 내게 더 가까운 사이가 아닌가 했다.
지난해 4월,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2층짜리 가정집을 개조해 서점, 미용실, 공방, 카페 등 가게 9개를 하나로 묶는 ‘어쩌다 가게’를 낼 때만 해도 비하인드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과 함께 장사를 해보자는 생각 정도였다. 그런데 재미를 위한 작업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사회적 반응을 얻었다. 지금 홍대 앞의 가장 큰 이슈는 임대차보호법과 권리금 문제다. 어쩌다 가게를 월세가 높아 오랫동안 장사를 못하는 문제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주의 깊게 보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올해는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게 됐다.
지난주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 근처에 집 지을 땅을 계약했다. 어쩌다 가게 2호점이 들어설 자리다. 2번째 어쩌다 가게는 연남동 1호점보다 2배 넘는 규모가 될 예정이다. 땅 넓이가 그렇고, 높이도 지하 1층, 4개 층이 될 것이다. 지하엔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목공방이나 대형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와서 공간을 나눠 쓰며 함께 작업했으면 좋겠다. 비어 있는 공간을 마음대로 쓰라고 하면 절대로 일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쓰는 사람은 건축가의 의도처럼 쓰지 않는다. 셰어 하우스는 프로그램을 명료하게 운영하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1층엔 1호점처럼 카페 라운지가, 2층엔 제품을 만드는 공방이 있을 자리다. 3~4층은 사무실을 나눠 쓰는 셰어 오피스다. 내가 이진오, 박인영 건축가와 함께 하는 ‘사이건축’ 사무실도 3~4층 중 한곳에 들어갈 예정이다. 셰어 오피스에 들어오는 사람들과 사이건축의 전자기기나 회의실도 나눌 생각이다.
어쩌다 가게 1호점은 사이건축이 주로 투자했지만 2호점은 쓸 만큼은 벌 것으로 보인다. 책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에 나오는 빵집과 우리 가게가 비슷한 점이 있다. “최종적인 목표는 이윤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윤을 남기지 않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건강한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빵이 썩도록 내버려둬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
내가 2호점 밑그림을 그릴 동안 함께 일하는 이진오 소장은 연남동 동진시장 근처에 셰어 하우스 ‘어쩌다 집’을 짓고 있다. 204.60㎡ 넓이 땅에 지어지는 이 집 3층엔 이 소장이 살고, 2층과 5층은 5가구가 함께 집을 나눠 쓸 예정이다. 1층은 마을 식당과 커뮤니티 공간으로 운영된다. 가게와 사무실, 원룸과 셰어 하우스, 복층 주거가 어우러지고 골목과 마당, 라운지를 공유하는 집이라 더 재밌고 풍요로워질 것으로 기대한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작은 개인 공간이 공유 공간을 통해 넉넉해질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모였다. 돌이켜 보면 비하인드 카페, 어쩌다 가게, 사이건축 등에서 여러 사람과 오랫동안 동업해왔다. 우리는 항상 느슨한 유대감을 강조한다. 가족이든 타인이든 끈끈하게 얽히기를 원치 않는다. 필요한 만큼만 동거하고 적정 거리를 유지하기를 바란다. 마치 일년에 몇번 만나서 같이 투어하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지는 밴드 롤링 스톤스처럼! 그렇게 느슨하게 친한 사이는 40년, 50년을 넘기기도 한다.
임태병 사이건축 소장, 정리·사진 남은주 기자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