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패션, 악역 캐릭터, 문화평론가, 서장훈 등 90년대를 호출하는 2015년의 문화코드들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90년대 댄스 음악, 힙합 패션, 복고 스타일 드라마…. 물론 우리는 단순히 타임머신을 타고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도 앞선 소비를 지향했던 90년대 소비자들은 돌아온 90년대 브랜드를 전혀 다른 모양으로 소비한다. 문화융성 시대인 90년대와 닮은 지금 우리 사회의 몇가지 문화코드를 짚어봤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응답했다 ‘잔스포츠’ ‘에어포스원’
‘강남 힙합, 강북 복고’. 90년대 스타일은 이렇게 요약된다. 90년대 중반 신촌, 홍대 앞에선 몸에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을 동안 강남 일대에는 힙합 패션이 물결쳤다. 먹는 것 빼고는 모든 게 힙합이었던 압구정에선 다들 자신의 몸보다 서너 치수 큰 옷을 입고, 자신의 발보다 5㎝는 큰 운동화를 신었다.
90년대 초반이 국산 브랜드의 중흥기였다면, 후반은 폴로, 버버리, 노티카, 챔피온, 나이키 등 수입 브랜드의 시대였다. 특히 강남역 한복판이나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에선 열 중 아홉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폴로로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게 전혀 우스꽝스럽지 않았던 시대에 폴로의 테디 베어 스웨트 셔츠(당시엔 ‘맨투맨’이라고 불렀다), 로고 포켓 티셔츠와 데님 셔츠, 더플코트는 언제나 품절 상태였다. 그리고 국민 (꿈의) 운동화 나이키. 아르바이트를 한달 내내 열심히 하면 30만원을 벌던 시절에 멀티숍에서 팔리던 한정판 에어포스원(사진)과 에어 조던의 가격 역시 30만원이었지만 늘 없어서 못 구하는 위용을 과시했다.
형광색 프린트 티셔츠, 스냅백, 과장된 농구화와 디스코. 최근 몇 년 사이의 유행이 대략 80년대에 가까웠다면, 최근 거리패션에서 90년대의 기운이 느껴진다. 지난해 90년대 국민 가방 잔스포츠 매출은 2배 정도 늘었다고 한다. 인스타그램 등의 에스엔에스에는 올겨울 폴로 매장에 다시 등장한 테디 베어를 찍어 올린 사진들이 물결쳤다. 나이키 에어포스원에 대한 사랑은 한국이 유독 각별하다. 십몇년 전 이 브랜드들은 ‘명품 신드롬’이란 말을 업고 나왔다. 지금은 더 비싼 패션 브랜드를 소비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다른 이유로 비슷한 옷을 집어든다. 글 장승호 <지큐 코리아> 에디터, 사진 이신구 작가, 제품 김준희 제공
글에서 말로 돌아온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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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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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문화비평가’라는 신종 직업이 출현했다. 그전까지 ‘비평가’라는 말이 갖는 강단이나 문단의 무게를 벗어던진 이들은 작품 대신 패스트푸드점이나 록카페, 24시간 편의점,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카페에 대해 ‘비평’하기 시작했다. 90년대의 아이돌은 강영희, 임진모, 강헌, 정성일, 서동진처럼 삶에서 문화의 크기가 급속히 커지는 상황을 서구 문화이론과 관련해 해독해 낼 능력이 있는 스타 비평가들이었다. <문화과학>(1992년 여름 창간), <오늘 예감>(91년), <리뷰>(94년) 같은 문화비평지뿐 아니라 영화잡지, 시사지와 남성지까지 창간되면서 90년대는 80년대의 함성 대신 평론 소리로 붐볐다. “문화평론가는 정답을 말하고 그것이 사회담론이 되는 패러다임이 형성됐다. 평론가들의 이빨은 영향력이 커졌다.”(<키치 소년, 문화의 바다에 빠지다>, 노염화 지음, 토마토 펴냄, 1997)
2000년대에 이들 평론가는 방송에 나와서 글이 아닌 말로 ‘썰’을 푼다. 개그 능력이 없어도 왜 요즘 평론가들이 방송 단골 섭외 대상인지는 영화평론가 허지웅(왼쪽 사진)씨가 새로이 얻은 별명으로 분명해졌다. ‘뇌가 섹시한 남자’다. 시사평론가로 시작해 최근 예능프로그램에 진출한 진중권(오른쪽)씨가 원조 뇌섹남으로 거론됐듯 영화, 음악, 문학, 시사까지 자기 분야가 있으면서 비평가 특유의 독설과 직관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비평가들은 시사, 오디션 프로그램, 심지어는 연애나 연예 토크에까지 나온다. 90년대 편의점 비평은 21세기 남녀상열지사 비평으로 더욱 깨알 같아졌다. 바야흐로 본격 이빨의 시대에 뇌섹녀, 여자 평론가들이 아직 뜨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함정이다.
글 남은주 기자,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원조 악녀의 귀환
90년대 악녀들은 누가 봐도 악녀였다. <미스터 큐>(1998)의 황주리(송윤아), <토마토>(1999)의 윤세라(김지영) 등은 감정 표현에 충실해 화가 나면 눈을 치켜뜨고,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두뇌싸움이 안 되니까 악행이 단숨에 들통났다. 밝은 염색 머리에 화려하고 차가운 느낌의 패션, 짙은 립스틱 등 악녀들의 스타일 공식이 있었다.
파악하기 쉬웠던 90년대 악녀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사라졌다. 2008년 <태양의 여자> 등은 왜 악녀가 될 수밖에 없었느냐에 주목했고, 2010년을 지나면 악녀인 듯 악녀 아닌 악녀 같은 여자들이 나왔다.
최근 90년대 스타일 악녀들이 다시 돌아왔다. 드라마 <왔다! 장보리>의 악녀 연민정(이유리·사진)은 90년대 악녀들의 완전체다. 연민정은 1990년~2000년대 초반 악녀들의 극한의 모습을 모두 갖고 탄생했다. <유리구두>처럼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자신이 친딸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이 들킬까봐 악행을 반복한다. 도무지 감정을 숨기는 법도 없다. 화가 나면 눈을 부라리고, 소리를 지르고, ‘없애버려야겠어’ 생각하면 바로 실행에 옮긴다. 입술을 강조한 메이크업과 화려한 염색의 스타일도 90년대다. <전설의 마녀>의 마주란(변정수)은 과장된 표정연기에 단순무식 캐릭터로 인기를 얻고, <달려라 장미>의 강민주(윤주희)는 복수의 방식도 유치하다.
90년대 드라마 <청춘의 덫>(1999년)의 서윤희(심은하)는 자신을 배신한 남자에게 말했다. “부숴버릴 거야!” 2014년 드라마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도 라이벌 장보리에게 속삭였다. “날려버릴 거야 후~.”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예능 대세 된 코트의 거인
1992년 만화 <슬램덩크>가 연재를 시작하고, 1993년 연세대 농구팀이 코트를 지배했다. 갑자기 돌아서서 골을 터뜨리는 서장훈은 <슬램덩크> 채치수의 완벽한 현신이었다. 이제 서장훈은 ‘돌싱’이고, 건물주고, 예능프로그램의 대세다. 20년 전 나이 든 그를 상상했다면, 기껏해야 감독이나 해설가였을 것이다. 그런데 ‘콩트’ 일색이었던 1990년대의 한국 예능프로그램이 21세기 ‘리얼’과 ‘토크’란 흐름을 잡으면서 서장훈은 예능인으로 돌아왔다.
과묵한 표정과 험상궂은 인상의 서장훈이 예능에 안착할 수 있었던 건, 현실에서 구축한 또 다른 캐릭터들 덕분이었다. 김구라는 그의 가정사를 거론하고, 윤종신은 그에게 ‘국민 건물주’라는 별명을 헌사했으며 김태호 피디는 그를 ‘거대한 케빈’으로 만들었다.
저돌적이고 거친 플레이를 구사했던 서장훈이 귀여운 아저씨가 되었다. 다른 운동선수 출신 예능인들처럼 출연자에게 뽑아낼 건 최대한 뽑아내는 예능의 리듬을 받아들인 서장훈은 반갑지만 낯설다. 하지만 지금도 서장훈은 경기 흐름에 불만을 가질 때가 매력적이다. <해피 투게더>에서 조세호가 서장훈의 감추고 싶은 이야기들을 폭로하는 순간, 욱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그는 다시 방송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직 그의 마음에는 코트의 기질이 남아 있지만 몸은 방송 무대에 있다. 바로 그 두 가지가 충돌하는 순간의 표정. 스포츠와 방송, 과묵한 운동선수와 예능인의 사이의 간극.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이라도 방송을 박차고 나갈 것 같은 긴장감. 그것이 바로 지금 한국 예능프로그램에서 서장훈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리얼’이다. 강호동도, 강병규도, 박광덕도 보여준 적이 없었던 재미다.
강병진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뉴스에디터,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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