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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향교 명륜당과 400년 된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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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알고 떠나는 서원·향교 여행
엄숙하고 고루한 공간으로 인식돼온 서원·향교의 변신…대성전 앞 대중음악 공연 등 젊은 여행자 부르는 프로그램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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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향교 대성전 앞에 선 김춘원 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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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타분하다고? 헛헛, 고래짝(고릿적) 옛날 얘기 허고 있구마이라.”
4년째 전주향교 전교(향교의 우두머리)를 맡고 있는 김춘원(85) 어르신이 손을 내저으면서, 참 세상 물정 모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쪼께 지켜보면 알것인디, 인자는 젊은이들 데이트 코스요, 놀이터락게.” 한낮이 되자 향교 안팎은 전교 어른 말씀마따나 팔짱 끼고 허리 두른 채 거닐고 달리며 깔깔대고 셀카봉 휘두르는 청춘들로 넘쳐났다. 청춘들은 의관을 갖추고 경내를 거닐던 김 전교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며 유교와 예절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고리타분하고 편벽고루한, 고집불통의 근엄한 공간. 유교문화의 본거지이자 옛 선비들의 학습공간이었던 향교와 서원이, 남녀노소의 문화체험·나들이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극히 일부 서원·향교를 제외하곤 발 들이기가 썩 내키지 않던 엄숙한 문화유적지, 먼지 쌓인 공자·맹자들의 위패와 건물만 남아 쇠락해가던 향교와 서원들이 최근 낡은 빗장 풀고 쭈그러든 속살 내보이며 대중들 앞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전통문화의 한 자락을 배우며 여행하려는 학습체험 여행자들이 느는데다, 이에 발맞춰 완고했던 유림들이 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마련에 갓끈 풀고 호응하는 데 따른 변화다.
성리학자 기대승(1527~1572)을 모신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봉서원의 경우 이미 8년째 문화공연과 함께 다양한 인문학 강연을 펼치는 ‘살롱 드 월봉’ 프로그램을 매달 진행하며 시민들과 호흡해오고 있다. 특히 유서 깊은 서원 9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정식 등재를 기다리고 있어 전통 교육기관들에 대한 조명도 활발해질 전망이다. 전통에 충실하면서 보고 즐길 거리 풍성한 대표적인 향교 한곳과 서원 두곳을 찾아 변하고 있는 모습을 들여다봤다.
청춘남녀 들이대고 속삭이는 ‘신성한’ 전주향교
“자, 올라갈 땐 요기로, 내려갈 땐 조기로. 가운데 계단은 여기 모신 성현들이 드나드는 곳인게로.” 5성인(공자와 안자·증사·자사·맹자 등 4제자)과 중국 및 우리나라 성현 등 51인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 앞 월대 계단에서 김춘원 전교가 쌍쌍의 젊은이들에게 설명했다.
전주향교는 규모와 내용 면에서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향교로 꼽힌다. 고려 공민왕 때 풍남동에 처음 세워진 뒤 사대문 밖으로 옮겼다가 1603년 현재 위치에 자리잡았다. 일반인 출입을 금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고집해왔던 이곳은 3년 전 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여가 성인 모신 곳이라 문을 콱 닫아불고 있었는디, 반대를 무릅쓰고 싹 열어부린 것이요.”
젊은 대중음악인들의 요란하고 현란한 밴드 공연이 대성전 앞 무대(월대)에서 펼쳐지게 되자, 지역 유림을 중심으로 “옛 성현을 모신 신성한 공간에서 딴따라 공연이 웬말이냐”며 반대 여론이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 전교는 “유교문화도 세태에 맞게 자꾸 변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려 성사됐고, 그 뒤론 수시로 음악회·연주회가 벌어지고 있다. “일반인들, 특히 여성은 얼씬도 못하던 데”를 이젠 짧은 치마·바지 차림도, 한복 차림도 제한 없이 드나들며 즐기고 누린다. 전주향교는 이제 한옥마을 탐방객의 필수 코스로 자리잡았다. 수시로 공연 행사가 벌어지고 제례 모습도 공개돼 인기를 끈다. 향교 안에 한복 대여소도 마련됐다.
호남지역 대표하는 전주향교
3년전 대문 활짝 열고
한옥마을 탐방객 필수코스로
류성룡 위패 모신 병산서원
경관 빼어나기로 으뜸
하지만 ‘교육 본색’은 숨김없이 이어간다. 요일별·계절별로 학습 일정이 쉼없이 이어진다. 초등생을 대상으로 윤리·서예·예절을 가르치는 일요학교가 매주 진행되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요일별로 서예·시조·한문·음양오행건강학 등을 강의하는 무료 전통문화학교가 개설돼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유교문화 활성화 지원사업의 하나로 이뤄지는 ‘유교 아카데미’(성인유교교실·청소년인성예절교실, 매주 수요일)도 진행중이다.
전주향교는 건물 배치상 여느 곳과 반대로 강학공간(명륜당·동재·서재)이 제향공간(대성전·동무·서무) 뒤에 있는 드문 모습이다. 김 전교는 “명륜당이 대성전 뒤에 놓인 ‘전묘후학’의 배치인데, 전국 서원 중 이런 배치는 세곳밖에 없다”고 말했다. 채색한 대성전과 달리 자연스런 나무 빛깔 그대로 낡아가는 명륜당의 자태가 아름답다. 본디 정면 세칸이었다가 양쪽으로 한칸씩 이른바 ‘눈썹지붕’을 덧대어 정면 다섯칸 건물이 된 모습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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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향교 산수유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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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향교 안팎엔 물오른 청춘남녀가 아니더라도 봄빛이 한창이다. 김 전교가 명륜당 옆 서재 마루에 앉아 잔뜩 꽃봉오리들이 맺힌 산수유, 청매·홍매 나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똑 큰애기 젖가슴 불드키 불어나고 안있소. 시방 곧 터지부리것네이.” 전주향교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촬영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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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 경장각의 용머리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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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 많은 필암서원, 경관 빼어난 병산서원
향교가 도심 속 공립학교라면, 서원은 도심에서 떨어진 조용하고 경치 좋은 장소에 자리잡은 사립학교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의 필암서원은 볼거리 많고 체험학습 행사들도 적극적으로 벌이는 호남의 대표적 서원이다. 서원 철폐 때 살아남은 서원 중 호남지역 유일의 서원으로, 향교에 배향된 우리나라 18현 중 유일한 호남 유학자인 하서 김인후(1510~1560)와 제자인 양자징(담양 소쇄원을 건립한 양산보의 아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서원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서 김인후는 중종 때 세자 인종의 스승(세자시강원 설서)이다. 인종이 세자 시절 그려 선물한 <묵죽도>(광주박물관 소장)가 전해온다. 아름다운 2층 문루인 확연루, 정조가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하며 하사한 건물로 묵죽도의 판각을 보관해온 경장각, 강당인 청절당, 그리고 소박한 동·서재 건물 들이 모두 고색창연하고 아름답다. 경장각 현판 글씨는 정조 친필이고, 확연루 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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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병산서원 강학당인 입교당 마루에 앉아 바라본 7칸 규모의 만대루. 앞산이 병풍처럼 둘러섰다는 병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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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에선 지금까지 청소년예절교실, 선비학당, 청렴교육 등을 진행해오고 있지만, 최근 여기에 유교문화 활성화 지원사업 서원으로 선정되면서 4월부터는 1박2일 일정의 가족단위 선비교육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밥상머리 선비교육 회·초·리(回·初·理)’ 프로그램의 기획과 진행을 맡은 ‘청년유사’(향교·서원 실무자) 김채림씨는 “어린 자녀와 가족이 서원에서 머물며 함께 선인의 정신을 느끼고 깨쳐보자는 취지”라며 “최근 젊은층 방문자가 늘고 있어 체험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준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원 옆 유물전시관의 김인후 선생 유물과 서책, 자료들도 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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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향교 앞에서 만난 남녀 한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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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서원들 중 경관이 빼어나기로는 안동의 병산서원이 꼽힌다. 요즘 드라마로 방영되며 주목받는 <징비록>을 지은 서애 류성룡(1542~1607)과 그의 아들 류진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인 입교당 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낙동강을 끼고 병풍처럼 둘러선 앞산(병산)과 겹쳐진 일곱칸이나 되는 대형 문루 만대루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역시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서원으로, 상설 프로그램은 없지만 단체로 신청하면 서원 숙박 체험도 가능하다. 류성룡의 13대손으로 30년째 서원을 관리하고 있는 류시석(62)씨는 “병산서원은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서원 9개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곳”이라며 “몇년 전까지도 하회마을만 북적였는데, 요즘엔 서원을 찾는 쌍쌍의 젊은이들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동·서재 앞의 홍매·청매가 만발하는 봄 경치와 400년 된 배롱나무들이 꽃을 피우는 여름 경치가 특히 아름답다.
전주 장성 안동/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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