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4.15 20:51
수정 : 2015.04.16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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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선술집, 신포주점.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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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요리
60~70년대 문화예술인의 순례지, 인천 신포시장 선술집
화가 사석원은 선술집을 좋아하는 예술가다. 오죽하면 자신의 단골 선술집을 책으로 묶어 소개했을까!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던 선술집 문화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지만 인천 신포국제시장에서는 명맥을 잇고 있다.
지하철 1호선 동인천역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신포국제시장은 닭강정이 유명하다. 지금도 들머리에서는 닭강정을 사려는 이들이 장사진을 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시장 깊숙이 들어가면 ‘신포주점’이 있다. 흔들거리는 간판, 낙서투성이 벽면과 낮은 조명 등 세련된 술집과는 거리가 멀다. 북어찜, 멍게 같은 간단한 안주가 고작이지만 무려 45년이나 영업했다. 벌거벗은 여인을 그린 수묵화 아래 ‘얼마나 사랑하길래… 그토록 오랫동안 수화기를 놓지 못하는가?’ 신파조의 글이 적혀 있다.
지금 주인은 장경희(61)씨다. 하지만 본래 이 집을 기억하는 이들은 김영숙씨를 거론한다. 김씨는 몇년 전 병을 얻어 단골이었던 장씨에게 가게를 넘겼다. 장씨는 “그 언니, 대단했다. 굶어죽어도 손님들 가려서 받았지. 신포주점 역사는 그 언니야”라고 술회한다. 인천에서 내로라하는 예술가치고 이곳을 모르는 이는 없다.
술이 한 순배 돌고 나면
헐렁한 양복 걸친 색소폰 노인 등장
‘동백아가씨’를 연주한 뒤
막걸리 한잔 얻어 마시고
다른 선술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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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술안주인 빈대떡. 정식당의 메뉴.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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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오후 5시께 이 집을 찾은 김상운(62)씨는 “고등학교 졸업하고부터 단골이지. 그때는 여기 발 붙일 틈이 없었어. 그 누님 보려고도 많이 오고. 참, 올곧은 분이셨지. 술집 분위기 망치는 사람은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쫓아냈어. 이 집 자체가 예술이야”라고 추억담을 풀어놓는다. 김영숙씨의 북어찜은 인기가 많았다. 1970년대 주머니가 얇아 안까지 들어오지 못한 이들은 밖에서 막걸리 한잔과 소금을 안주로 먹곤 했다. 김상운씨와 동행한 동갑내기 친구 강상호씨는 “우리는 정이 남아서 여기를 떠날 수가 없어”라고 말한다. 이튿날 저녁 7시께 왁자지껄한 선술집 특유의 풍경이 펼쳐졌다. 흥겨운 한잔 술의 취기가 오선지를 그린다. 손님도 주인도 없다. 주인도 동무가 되어 건배를 하고 이 식탁 저 식탁의 손님들이 서로 인사를 나눈다. 대가족이 잔치판을 벌이는 모양새다. 시인이자 ‘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인 이종복씨는 “신포주점뿐만 아니라 대전집, 다복집, 정식당, 특히 유명했던 백항아리집 등 문화가 있는 선술집이 인천에 많았다. 출석하는 양반들도 시인, 소설가, 화가들이 많아서 즉석에서 시낭송회가 벌어지곤 했다. 서로 교류하고 영감을 얻었다”며 “한국 근대문학사에는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처럼 인천을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이 많다. 근대 이후 대한민국 문화의 인큐베이팅 역할을 (인천의 선술집이) 했다고 본다”고 한다. 그는 1986년 없어진 백항아리집의 얘기를 풀어놓는다. 백항아리집은 인천에서 1960년대부터 유명한 선술집이다. 기껏해야 새우젓이 안주였던, 자랑할 것도 그다지 없었던 백항아리집은 웬만한 강단이 아니고서는 문지방을 넘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그 집에는 이씨의 아버지뻘 되는 이들이 포진해 있었다. 시국을 논하고 문학에 관해 토론을 했다. 술이 한 순배 돌고 나면 헐렁한 양복을 걸친 ‘색소폰 노인’이 찾아와 ‘동백아가씨’를 연주했다. 한사코 돈을 거부한 노인은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다른 선술집으로 향했다. 근대문학에서나 튀어나올 법한 낭만적인 풍경이다. 폐업이 아쉬워 백항아리를 소장용으로 산 이도 있었다. 가게 이름이 백항아리집이 된 사연은 주점 가운데에 높이 1m 정도의 백항아리가 있어서다. 주인이 그 항아리에서 탁주를 퍼서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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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집의 담백한 족발.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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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통 가운데 있는 ‘정식당’은 자타 공인 백항아리집을 이었다고 한다. 정식당의 주인 유정자(86)씨는 “81년부터 이 시장에서 빈대떡, 튀김 같은 전을 팔았는데 백항아리집이 없어진 거야. 백항아리집 단골이 와서 막걸리 팔라는 거야. 그때부터 막걸리를 팔았는데 백항아리집 단골들이 우리집으로 다들 왔어”라고 증언한다. 정식당의 역사도 30년이 넘는다. 백김치를 잘게 썰어 넣고 구운 바삭한 빈대떡이 대표 안주다. 일본에서 태어나 17살에 인천으로 건너온 그는 정식당을 운영하면서 5남매를 키워냈다. 지금은 맏며느리가 맡아서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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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포국제시장에 있는 다복집에서 파는 스지탕.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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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집’이나 ‘다복집’은 이들 두 집과는 달리 푸짐한 먹거리가 있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스지탕’이 있다. ‘스지’는 소의 사태살에 붙어 있는 힘줄인데 일본식 발음이다. 스지탕은 물컹한 도가니탕인가 싶으면 은근한 설렁탕이고, 매콤한 매운탕인가 싶으면 속을 풀어주는 해장국이다. 대전집도 40년이 넘었다. 정식당과 더불어 창업자가 살아있는 곳이다. 주인 오정희(77)씨는 “왜정 때 지은 건물이라 쥐가 천장을 두드득 뛰어다녔었다”고 한다. 아이엠에프 때 적산가옥이었던 이 집을 큰아들과 함께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고생은 말도 못하게 했지. 남의집살이해 모은 종잣돈하고 빚내서 이 집 했어.” 이 집 족발은 담백하다. 동치미는 술로 쓰린 속을 확 풀어준다. 그는 신포주점 창업자 김영숙씨처럼 “인간성 나쁜 놈”은 못 오게 했다. 그가 30대 중반일 때 일이다. 인천에서 힘깨나 쓰는 걸로 유명한 건달과 대거리를 했다. 건달이 취해 주방의 젊은 아줌마를 “연애나 걸자고” 끌고 나가려고 하자 그가 언성을 높였다. 건달은 주방에 쳐들어가 칼을 집어들고 오씨를 두 번이나 공격했다. 결국 살인미수로 경찰서로 끌려갔으나 그때부터 더 큰 사달이 났다. 까만 양복을 입은 건달의 후배들이 가게를 점령하다시피 한 것이다. 결국 오씨의 선처로 건달은 풀려났고 후배들은 그를 누님이라고 부르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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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신포국제시장의 명물, 닭강정을 먹으려고 줄 선 사람들.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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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에 있는 다복집도 오래된 선술집이다. 대전집의 스지탕에 큰 덩어리 감자가 들어간다면 이곳 스지탕에는 잘게 자른 감자를 넣어 한 숟가락에 먹기 좋다. 스지탕, 족발, 꽃게장이 맛나기로 유명하다. 7년 전 작고한 한복수씨가 1967년께 열었다. 지금은 그의 부인 이명숙(71)씨와 맏딸이 운영한다. “낡아서 고치려고 하는데 손님들이 그 맛에 오니까 고치지 말라고 하네.” 이씨의 말이다. 황토색 원형 식탁과 동그란 의자는 개업 초기에 마련한 것이다. 영화 세트장 같다. 2004년 타계한 시인 최승렬의 단골집이었다.
이들 선술집들의 쇠락은 80년대 중반 시청이 남동구 구월동으로 이주하면서다.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재래시장을 찾는 인구도 줄기 시작했다. 신포동 일대에는 급격하게 도심공동화 현상이 발생했다. 젊은 친구들은 세련된 술집을 찾는다. 인천문화재단 김윤식 대표는 “백항아리집이 있었다면 그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관광거리였을 것이다. 몇 집이 남았지만 서글프다. 문화예술인들의 순례지였고 산실이었다. 보존해야 할 문화다”라고 말한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신포국제시장 맛집 정보
신포국제시장은 먹거리 천국이다. 40년이 넘은 선술집을 둘러보는 것도 즐겁지만 전국적으로 유명한 닭강정, 겉은 바삭하고 안은 텅 빈 공갈빵 등을 맛보는 것도 큰 재미다.
시장 안 민어골목에는 경남횟집, 민어칼국수가 있는 해동횟집, 덕적식당이 있다. 덕적식당은 생선조림, 구이 등이 메뉴지만 민어회, 뱅어회 등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싼 편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야채치킨’이다. ‘신포야채치킨’(우리집양념통닭)은 파슬리가루, 깻잎 등 각종 채소를 튀김가루에 섞어 튀긴 치킨이다. 주인 최기순씨는 “우리집이 원조다. 따라 많이 생겼었는데 지금은 거의 없고 우리만 있다”고 한다. ‘신포 핫바’ , ‘신포 전 전문’ 같은 핫바와 전 전문점도 많다. 1958년에 문 연 ‘신신옥’에는 장어튀김과 우동 등이 있다. 재래시장의 단골 메뉴인 만두, 순대, 칼국수 등도 있다. 대부분 가격 부담이 크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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