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5.27 20:22
수정 : 2015.05.2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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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푸에서 만난 부탄 여성 도지(왼쪽)와 린진. 사진 김소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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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소민의 부탄살이
※ 독일 본에서 타향살이를 보내오던 김소민씨가 작지만 행복한 나라 부탄에서 2년간 머물며 부탄살이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부탄왕국 국적기 드루크에어가 준봉들 사이 골짜기로 빨려드나 싶더니 파로공항 활주로다. 20여분 전만 해도 구름 위로 솟은 히말라야 봉우리들을 찍겠다고 승객들이 창마다 다닥다닥 카메라를 들이댔더랬다. 학교 운동장 세 개쯤 붙여놓은 공항 공터에 드루크에어가 승객 50여명을 쏟아냈다. 비행기 계단을 내려오는 사이 산바람이 몸을 휘감았다. 공터 한쪽에 격자로 엮인 보머리가 한옥과 닮은 전통 부탄 양식 3층짜리 공항 건물이 서 있었다. 2년 동안 이어질 부탄살이의 시작이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길 가다 만나 살게 된 남자가 하필이면 독일인, 독일어 좀 들리나 싶더니 남편이 전근이란다. 가난하지만 국민총생산(GNP)보다 국민총행복(GNH) 지수를 높이 친다는 나라, 국토의 60%를 숲으로 남겨야 한다고 법으로 정한 나라로 가기 전, 우리가 한 일은 사재기였다. 남편은 산을 오를 근육은 안 키우고 산악용품 몸집을 불렸다. 그는 독일인들의 풍토병인 날씨 공포증을 앓고 있다. 오리털이라면 눈이 돌아갔다. 처음엔 비웃었는데 나도 슬슬 발동 걸렸다. 생리대를 사들였다. 내가 밀고 멘 가방들만 53㎏, 프랑크푸르트공항 에스컬레이터에서 가방을 주체 못해 널브러진 채 안전요원이 일으켜 세워줄 때까지 허우적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꼽힌다는 부탄에 가기 전, 나는 개 공포에 빠졌다. 마틴 위츠는 10년 전 쓴 책에서 부탄의 밤은 개가 다스린다고 썼다. 불교 철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길거리 개한테 중성화 수술을 시키지 않는 까닭에 개체수가 사정없이 늘었다는 거다.
뭘 해야 할까. 아무도 없다. 부탄의 수도 팀푸에서 눈뜬 첫날, 나를 덮친 두려움은 개가 아니라 막막함이었다. 별수 있나, 무조건 밖으로 나갔다. 걷다 보니 판잣집에 빨래가 주렁주렁 널렸는데 그 앞으로 골프 코스가 펼쳐진 게 보였다. 이 이상한 조합에 두리번거리다 골프공을 만지고 있는 청년에게 이 집의 정체를 물었다. 아디다스 추리닝을 입은 29살 킴보는 이 골프장 캐디인데 이 집에서 삼촌과 살고 있다. 한국 배우 조희봉을 닮았다. 노래방을 좋아하는 그는 공부를 잘했다면 학비 없는 국립대학에 들어갔을 텐데 못했다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사이 킴보의 친구 예시가 대화에 끼었다. 보건단체에서 일했다는 예시는 내가 개를 무서워한다니 5년 전께부터 길거리 개 예방접종과 중성화 수술이 이뤄지고 있다며 개 한쪽 귀에 살짝 잘린 표시가 있으면 마음 놓아도 된다고 했다. 처음 사귄 친구들에게 연락처를 물으니 페이스북 주소를 알려준다. 예시는 아예 자기 패스워드까지 다 불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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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개들. 사진 김소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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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역시 오란 데가 없다. 무작정 걷다 보니 3대 왕이 세웠다는 팀푸의 명소 ‘내셔널 메모리얼 초르텐’이다. 3층 높이 백색 탑 위로 금색 장식이 뾰족하다. 그 주변을 부탄 전통 옷인 키라와 고를 입은 사람들이 돈다. 키라를 입고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여자에게 사진 찍어도 되냐 물었더니 옆에 앉으란다. 두 번째 친구 린진(25)과 도지(25)다. 린진은 인도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도지는 팀푸의 사립대학을 나왔는데 1년째 직장을 구하지 못해 고민이다. 도지는 한국 드라마에 빠졌지만 린진은 잘 안 본다. “한국 드라마는 주인공이 자꾸 병에 걸리거나 죽어서 슬퍼 못 보겠어요.” 말할 때 소프라노같이 목소리가 올라가는 린진이 물었다. “우리 절에 갈 건데 같이 갈래요?” 그렇게 어쩌다 ‘데칭푸’에 따라가게 됐다.
팀푸는 부탄에선 낮은 축이지만 해발 2300m 높이다. 조금만 올라가도 숨이 턱턱 막혔다. 멀리 색색 기도깃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흰색 깃발들은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흩었다. 넋 놓고 그 풍경을 보며 걷다 보니 흙으로 지은 성채 같은 ‘데칭푸’가 눈앞에 섰다. 린진이 절 앞에서 공양 드릴 것을 사기에 나도 1000굴트룸(약 1500원)을 내고 과자 봉지 4~5개를 챙겼다. 절 안으로 들어가니 우뚝 솟은 본채에서 둥둥 북소리가 들린다. 본채엔 린진과 도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
둘을 기다리며 아무것도 모르는 칠립(외국인)인 내가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대니 동자승이 뿔났다. 7~8살쯤 돼 보이는데 성깔이 대단하다. 양팔로 엑스자를 그려대더니 따라오란다. 그 권위에 코 꿰어 부속 건물로 따라 들어가니 노승이 창문을 등지고 앉아 불경을 읊고 있었다. 무서운 동자승이다. 시키는 대로 노승을 향해 세 번, 뒤돌아 불상을 향해 세 번 절하고 과자 봉지를 내놨다.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 나는 누군지 모르겠다. 눈치를 보니 노승 옆에 앉아 손을 내밀라는 거 같다. 엉거주춤 양손을 겹쳐 내니 동자승이 호령한다. “왼손 아래.” 모아 쥔 손 위로 노승이 차를 조금 따랐다. 손짓으로 마시라기에 들이켰다. 이어 노승이 불경을 적은 종이를 내 머리에 얹고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렇게 얼떨결에 축복을 받았다.
나중에 린진과 도지의 말을 들어보니, 그 차는 다 마시는 게 아니라 입만 축이고 내 머리 위쪽으로 흩어야 했다. 린진에게 직장 구해 달라 빌었냐고 했더니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비는 게 아니에요. 주시는 대로 그냥 받는 거예요.” 둘도 내게 휴대전화 번호, 이메일, 페이스북 주소를 적어줬다.
절 앞에서는 새로 산 현대자동차를 놓고 차 주인이 일종의 굿인 ‘푸자’를 드리고 있었다. 푸자를 주재하는 스님은 쌀을 던지며 차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전세계에서 신호등이 없는 유일한 수도 팀푸의 중심 거리엔 혼다, 스즈키 자동차 행렬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이곳에서 3년째 산 독일인 수산나는 “그새 차량이 2배는 늘었다”고 말했다. 부탄 법에 따라 6층 이상 고층건물은 없었지만 여기저기 공사 중이었다. 새 건물이라도 파사드는 전통 양식을 따라야 한다. 전통 옷인 고를 입은 남자와 청바지를 입은 청년이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았다. 아이폰6 선전 포스터가 붙은 한 마트엔 한국 라면이 진열돼 있었다.
팀푸는 변화의 급류를 아슬아슬 타고 있는 거 같았다. 그 속도야 아랑곳없이 개들은 중앙분리대나 화단에서 몸을 말고 여기저기 잠을 잤다. 나는 아직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는 구석은 이곳은 ‘어쩌다가’의 행운이 통하는 도시라는 점이다. 문만 열고 나가 말하면 된다. “쿠주장포라.”(안녕하세요)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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