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7.15 20:14
수정 : 2015.07.16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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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올 앤 아이>. 사진 <디올 앤 아이>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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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시계태엽 패션
<디올 앤 아이>는 감독 프레데릭 청의 2014년작 영화다. 주된 내용은 2012년 명품 브랜드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된 라프 시몬스가 첫 오트 쿠튀르 데뷔를 8주 앞두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2012년 7월 디오르의 첫 오트 쿠튀르 컬렉션이 세상에 선보여졌을 때 나는 대학생이었다. 그것도 패션에 대한 맹목적인 열정으로 똘똘 뭉친 대학생. 다시 읊기가 상당히 오글거리지만, 당시 블로그에 나름의 리뷰를 썼었다.
“7월 둘째 주, 파리 쿠튀르. 모두가 기대하는 쇼는 단연 라프 시몬스의 디오르 데뷔 쇼였다. 므슈 디오르의 뉴 룩(New Look)을 상기시키는 유선형의 절제된 실루엣은 라프 시몬스가 질 샌더에 있었고 그가 패션계에서 가장 칭송받는 미니멀리스트임을 보여주었다. 쇼가 끝난 뒤 그는 ‘실용적인 오트 쿠튀르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디오르의 유산과 미니멀리즘의 훌륭한 조화’와 같은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정말 오트 쿠튀르의 정의를 충실히 이행했는가? 몇몇 의상은 레디 투 웨어(기성복)처럼 보이지는 않는가? 그가 한 것이라곤 바통을 넘겨받는 것이었을 뿐. 초심자의 행운 같은 것이다.”
내가 이토록 라프 시몬스를 무작정 깐(?) 것은 당시 우아함과 급진적인 것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나에게 라프 시몬스는 벨기에의 파격적인 패션 디엔에이(DNA)만을 간직한 디자이너였다. 벨기에 안트베르펜(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의 학장이자 괴짜 디자이너로 불리는 발터 반베이렌동크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3년을 일했고, 발터가 데려간 파리 패션쇼에서 처음 패션에 눈을 떴으며, 그 결정적인 쇼가 패션계의 해체주의자로 불리는 마르지엘라의 1991년 쇼였고, 이 계기로 가구 디자이너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전환했으니 말이다.
라프 시몬스가 남긴 패션의 족적은 항상 새로움과 파격에 맞닿아 있었다. 그는 서브컬처(반문화)와 유스컬처(청년문화),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가지는 태도를 누구보다 패션으로 잘 녹여낸 디자이너였다. 나를 포함한 2000년대의 패션학도들이 닮고 싶은 디자이너는 반세기 전의 디오르라기보다 현재를 사는 라프 시몬스에 가까웠다. 나는 오로지 패션 때문에 라프 시몬스가 젊은 시절을 보낸 안트베르펜을 찾아간 적도 있었다.
그에 대한 생각을 다시 꺼내게 된 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고 있는 디오르의 전시를 보고 나서였다. 꽃에서 영감을 받은 옷으로 가득한 방에 들어가자 일렉트로닉 뮤지션 크라프트베르크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크라프트베르크는 라프 시몬스가 10대 때 심취한 뮤지션이자 1998 가을/겨울 쇼의 테마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존재다. 당시 멤버들이 런웨이에 등장하기까지 했다. 그가 만든 수많은 디오르의 의상보다 음악 하나가 저릿하게 다가왔다.
3년 전의 나는 디오르의 디자이너가 아닌 ‘개인’ 라프 시몬스를 보기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정교하게 만든 옷보다 눈에 즉각 보이는 개성, 젊음의 파격 같은 것 말이다. 라프 시몬스는 배경음악으로나마 자신의 과거를 좋아했던 이에게 비밀스런 암호를 말하는 듯했다. 디오르는 디오르고 나는 나대로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고.
제목으로 쓴 ‘디오르와 나’에서 ‘나’(I)는 누구일까. 라프 시몬스일까 혹은 디오르를 통해 추억의 태엽을 감은 나일까? 프레데릭 청 감독이 제작노트에서 말한 것처럼, 그 대답에 대한 가능성은 열어두려 한다. <끝>
남현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에디터
※ 이번 회로 ‘시계태엽패션’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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