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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고 김부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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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내 인생의 삼겹살
소설가 백영옥의 삼겹살 기행기, 포복절도 살과의 전쟁
ㅈ으로 시작하는 이름의 약이 있다. 푸른색 캡슐 형태의 알약인데, 다이어트 중인 여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약이다. 몸이 기름을 흡수하지 못하도록 작용하는 약이기 때문이다. 먹는 법도 간단하다. 식사 후 한 알. 물론 이 약에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예를 들면 만약 ㅈ을 먹기 전날 저녁에 치킨과 피자, 오징어튀김과 비빔밥 혹은 낙지볶음을 먹었다면 다음날 아침, 변기 속에서 뜻밖의 풍경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흡사 추상표현주의 대가 ‘잭슨 폴록’의 ‘변기 버전’의 작품을 보게 된단 뜻. ㅈ 때문에 우리 몸속에서 흡수되지 못한 기름의 잔상은 다음날 아침 변기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달리 모험심이 강한 나는 첫 소설 <스타일>을 쓰기 전, 직접 이 약을 복용했다. 정확한 생활체험을 통해 소설의 ‘핍진성’을 높인다는 작가정신에 입각한 행위(는 아니었고 그냥 다이어트가 필요해서)였다.
전날, 친구들과 문제의 삼겹살을 먹었다. 삼겹살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불판 위에 김치도, 마늘도 볶았다. 이렇게 먹어도 몸에서 기름을 흡수해주는 ㅈ이 있으니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회식 때문에 다시 한번 삼겹살을 먹었다. 아! 이 못 말릴 삼겹살 중독자들. 하지만 회사생활 하는 사람치고 삼겹살 안 먹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내겐 ㅈ이 있으니 다이어트 걱정도 없었다. 삼겹살에 소주. 2차로 간 치킨집에서 마신 크림 생맥주는 여름날의 백미였다.
삼겹살 회식 날씬하게 살아남기알약으로 해결 나선 이들
복통, 색깔 있는 액체 방귀 등
거리에서도 최악의 낭패 봐 문제는 이 약에 진짜 ‘최악의 부작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몸이 기름을 흡수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이 약은, 성분이 축적되면서 첫째 날보다는 둘째 날에, 둘째 날보다는 셋째 날에 더 강력한 효과를 볼 수 있다. 문제는 기름이 ‘변’에 섞여 나오다 보니, 같은 곳으로 나오는 다른 것에도 기름이 새어 섞여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방귀 같은 것! 그날, 나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을지로 어디쯤을 걷다가 극심한 복통을 느꼈다. 그야말로 온몸의 감각이 뱃속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틀 연속 기름기 많은 음식을 과식한 탓도 컸지만 무엇보다 ㅈ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내 다섯살짜리 조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똥’이었는데, 그 애는 변기통의 자기 응가를 보고 손을 흔들며 “안녕, 잘 가~ 내일 또 만나!”라고 인사하는 아이였다. 그 조카가 다음으로 좋아하는 건 ‘방귀’였다. 당시 대한민국의 어린이들은 <방귀 대장 뿡뿡이>를 보며 방귀에 대한 사랑을 나날이 키워가고 있었다. 나는 이비에스(EBS)를 틀어놓고 조카와 뿡뿡이 주제가도 함께 부르는 좋은 이모였으니, 말을 말자.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조카에게 방귀에는 ‘냄새’만 있는 게 아니라 ‘색깔’도 있다는 얘길 해줄 수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이모가 총천연색 방귀와 직접 ‘만났다!’라고 (내가 생각하기에 매우 교육적이며 공감각적인) 얘기를 해주었다. “이모! 그럼 이모가 만난 방귀 친구는 빨간색이야?”, “아니. 노란색, 빨간색, 초록색, 음… 기타 등등이야.” 그때 날 바라보던 동생의 눈빛을 생각하면, 말을 말자. 소설 <스타일>의 이서정(패션지 기자인 그녀는 ‘ㅈ 체험기’를 쓰기 위해 그 약을 장복 중이었다)이 좋아하는 선배와의 꿈에 그리던 데이트를 하던 순간, ‘ㅈ 부작용’ 때문에 거사가 좌절되는 장면은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사실 그것은 내 투철한 작가정신의 승화였다(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때, 소설 속 이서정이 호텔 화장실 변기에 앉아 생각하는 건 이런 것이었다.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고는 치즈와 올리브뿐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치즈와 올리브에 그렇게 기름이 많았던 걸까 고민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올리브에 기름이 얼마나 많으면 올리브유라는 게 있었겠냔 말이다!” 나 역시 이름 모를 어느 건물 화장실 변기에 앉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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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백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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