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9.16 19:40
수정 : 2015.09.17 18:08
[매거진 esc] 요리
성욕·관능 등 에로스의 비밀 품은 서양 그림 속 음식들
서양의 그림 속에서 음식은 생김새나 상태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읽힌다. 가령 과일의 경우 싱싱하고 완전한 모양이면 청춘과 순결을, 그와 대비하여 베어 먹히거나 썩어가는 이미지는 순진하지 않고 늙어감을, 더 나아가서는 인생의 덧없음을 뜻한다. 흙이 묻은 감자는 노동의 고달픔을 이야기하고,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쩍쩍 틈이 갈라진 빵은 삶이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여기에 종교나 신화 이야기가 이차적으로 덧대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림 속 여자가 남자에게 사과를 건넨다면 그 장면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사과는 뱀의 유혹과 기독교적인 원죄의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과가 아니라 오렌지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두 남녀는 결혼하게 될 운명이다. 오렌지는 제우스신이 헤라에게 프러포즈할 때 선물한 과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먹을 것이 등장하는 서양 그림 중에는 남녀관계를 암시하는 작품들이 적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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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르 아에르천, <청과시장의 여인>, 1567년, 목판에 유채, 111×110㎝, 베를린 시립 고미술관. 그림 이주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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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르 아에르천 <청과시장의 여인>
식재료와 함께 그려진 사람은 남자건 여자건 관능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네덜란드의 피터르 아에르천이 그린 <청과시장의 여인>을 보자. 갖가지 채소와 과일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가운데 젊은 여인이 그것들을 팔고 있다. 여인의 하반신은 제대로 묘사되지 않은 채, 임신한 자궁과 복부를 연상하게 하는 둥그스름한 과일과 채소들로 대신 채워져 있는 이 그림에서 여인의 생식력과 청과의 풍성함은 동일시되고 있다. 특히 양배추는 임신한 육체를 은유하며, 씨 많은 호박과 알맹이로 가득한 포도는 다산의 전형적인 모티프들이다. 더욱이 화면의 오른쪽 위를 보면 마구간에서 서로 끌어안고 있는 남녀가 조그맣게 그려져 있는데, 이로 인해 그림 전체에서 성욕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싱싱한 과일은 청춘과 순결
미끈한 석화는 육체적 쾌락
남녀 함께 먹고 마시는 식탁은
욕망과 감정이 교차하는 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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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모체루티, <바구니를 든 소년>, 1745년께, 캔버스에 유채, 브레라 미술관, 밀라노. 그림 이주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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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모 체루티 <바구니를 든 소년>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러 다니다가 잠시 쉬고 있는 소년의 모습에서도 다산성과 관능성은 흥건하게 나타난다. 큰 장바구니를 등에 짊어진 소년은 무릎 사이에 살아 있는 닭 두 마리를 끼워놓고 닭이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다. 손으로는 닭의 발을 쥐고 있는데, 하필 그 손이 자신의 성기 근처에 있어서 야릇하게 성적인 기분이 느껴진다.
그의 시선은 마치 관람자를 자신의 성적인 행위에 끌어들이기라도 하는 듯 우리를 향하고 있다. 팔에 낀 작은 바구니 속에 가득 채워진 달걀은 소년의 잠재성, 즉 왕성한 생식력을 암시하는 것 같다. 사실 닭을 잡고 있다는 말 자체가 에로티시즘을 연상시킨다고 한다. 이를테면 네덜란드어로 ‘새를 잡는다’(vogelen)는 말은 ‘성교를 한다’는 뜻의 은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유럽의 여러 풍속화에서 남자가 새장에 손을 넣거나 새를 꺼내 만지는 장면은 여성을 탐한다는 뉘앙스로 자연스레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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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프랑수아드 트루아, <석화가 있는 점심>, 1735년, 캔버스에 유채, 180×126㎝, 샹티이 콩데 미술관. 그림 이주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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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프랑수아 드 트루아 <석화가 있는 점심>
그림 속 식재료 중에서 노골적으로 성적인 의미를 지닌 것은 석화이다. 석화에는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생굴을 입으로 삼킬 때의 축축하고 미끈한 감촉과 비릿한 향이 에로틱한 상상을 불러내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장프랑수아 드 트루아의 <석화가 있는 점심>을 보면, 귀족 남자들이 얼음에 담근 차가운 백포도주를 마시며 너나없이 석화 먹기에 정신이 없다. 왼쪽 아래에서는 푸른 옷을 입은 하인이 싱싱한 석화의 입을 칼로 열어 바로 먹기 좋게 다듬고 있다. 석화의 껍데기가 바닥 여기저기에 잔뜩 널려 있는 걸로 보아, 남자들은 지금 맛보기 정도가 아니라 몇 접시째 열을 올리는 중이다. 위쪽을 쳐다보면서 마치 접신이라도 하듯 어서 효능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이들의 머리 위쪽에는 하얀 대리석상이 놓여 있는데, 이는 육체적 쾌락의 여신 아프로디테 상이다. 최음제라는 단어, 아프로디시악(aphrodisiac)과도 연관된 이미지다. 그리스신화에 의하면 아프로디테는 바다의 흰 포말에서 태어나 거대한 흰 조개의 벌어진 입에 올라타고 바다 위를 건너 온다. 지금 아프로디테는 조개를 타고 남자들의 입속에 강림하여 쾌락의 은총을 내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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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아스 베이르트, <석화, 과일, 와인이 있는 식탁>, 1620년께, 캔버스에 유채, 53×73.4㎝, 내셔널 갤러리, 워싱턴디시. 그림 이주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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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아스 베이르트 <석화, 과일, 와인이 있는 식탁>
<석화, 과일, 와인이 있는 식탁>은 네덜란드의 오시아스 베이르트가 그린 석화가 있는 식탁의 이미지다. 성욕과 관련된 석화는 보란 듯이 하얗게 속살을 드러내고 요염한 누드처럼 누워 있다. 고급스러운 유리잔에는 와인이 담겨 있고, 그 바로 아래로 말린 과일과 치즈가 놓여 있다. 중앙에는 하얀색의 달달한 과자류가 보이는데, 결혼식 피로연에 올라오는 전형적인 스낵이다. 그러니까 화가는 신랑 신부의 달콤한 첫날밤을 위한 와인과 안주들을 그린 셈이다. 오른 위쪽에 그려진 알밤들로 볼 때 신랑과 신부는 아직 서로의 본능을 확인하기에 수줍기만 하다. 속살을 단단한 껍질 속에 몇 겹이나 감추고 있는 알밤은 순결과 정숙을 상징하는 과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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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 <라튀유 레스토랑에서>, 1879년, 캔버스에 유채, 93×112㎝, 투르네 미술관. 그림 이주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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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먹고 마시는 것, 그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는 연인의 감정 교류를 위해 필수적이다. 레스토랑에서 만나 강렬하게 시선을 주고받는 남녀의 모습을 포착한 에두아르 마네의 <라튀유 레스토랑에서>를 보자. 남자는 지금 혼자 브런치를 즐기고 있는 숙녀에게 용감히 접근한 듯하다. “오늘 저녁 같이 할까요?” 여자는 아직 대답을 망설인다. 오른편에 보이는 웨이터는 커피를 따라 줄 기회를 놓쳐버린 채, 행여 두 사람을 방해라도 할까 싶어 멀찍이 서 있다.
레스토랑은 본래 몸의 기운을 회복(restore)시키는 보양 수프의 이름이었고, 레시피(recipe)란 환자를 위한 음식 처방에 국한된 단어였다. 건강과 관련되어 있던 음식용어들이 점차 감정 교류의 맥락에서 쓰이기 시작하더니, 19세기 중반에는 의미가 바뀌었다. 레스토랑은 신사가 숙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데려가는 데이트 장소로, 레시피는 남편의 사랑을 받고 싶은 아내의 일기장에 적힌 특별한 요리비법이 된 것이다. 외식이건 가정식이건 식탁 앞에는 늘 욕망이 있어왔고, 화가들은 그 욕망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림 속의 음식이 흥미진진한 이유는 인간의 욕망과 교감의 기억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미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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