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9.30 20:40
수정 : 2015.10.01 14:03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제주, 다르게 놀기
최근 우후죽순처럼 늘며 핫플레이스로 급부상…이주민과 지역민 화합의 장터로 진화
|
요즘 제주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플리마켓인 벨롱장. 사진 서정민 기자
|
“여기 제주 바다를 담은 양초가 유명하다 해서예.” 부산에서 온 박민주(39)·박기남(33)씨의 손에 양초가 들려 있다. 지난 19일 낮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포구에서 열린 플리마켓(벼룩시장) ‘벨롱장’에서 산 것이다. 이곳의 히트상품 ‘제주바당 캔들’은 꼭 제주 바닷속을 닮았다. 3년 전 제주로 이주한 강혜영(26)씨는 8개월 전 이 양초를 처음 개발해 벨롱장에서 팔고 있다. 장이 열리는 내내 사람들이 몰려든다.
|
벨롱장의 히트상품인 제주바당 캔들. 사진 서정민 기자
|
벨롱장은 요즘 제주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플리마켓이다.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딱 두 시간만 반짝 열리고 사라진다. 그야말로 ‘벨롱’(불빛이 멀리서 반짝이는 모양을 뜻하는 제주말)이다. 장이 서면 제주바당 캔들 같은 독특한 물품을 들고 나온 셀러(판매자)와 관광객, 지역민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대부분 예술품·수공예품이고, 떡볶이·소시지 등 간식거리도 행인을 유혹한다. 솥을 뒤집은 모양의 쇠북 ‘항드럼’을 손으로 두드리는 거리의 악사도 인기다.
벨롱장은 2013년 초 세화리 인근 게스트하우스, 카페, 공방 등을 운영하는 이주민들이 서로 중고물품을 교환하는 벼룩시장을 열면서 시작됐다. 이주민끼리 정보를 교환하며 어울리는 자리의 성격이 강했으나, 차차 규모가 커져 오늘에 이르렀다. 벨롱장이 뜨면서 최근 제주 곳곳에서 플리마켓들이 우후죽순처럼 늘고 있다. 제주 정보 공유 커뮤니티 ‘일로와제주’(
www.facebook.com/ilowajeju)가 파악한 것만 28개다. 제주도청 문화정책과의 한웅 계장은 “소규모로 하는 것까지 치면 30개가 훨씬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관광객들은 관광지·맛집뿐 아니라 유명 플리마켓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제주 플리마켓 붐을 이끈 것은 이주민들이다. 한 계장은 “지난 8월에만 1500명이 제주로 이주했을 정도로 이주민들이 급증하고 있다. 30~40대 문화예술 관련자들이 많은데, 이들이 플리마켓 문화를 형성하는 모양새”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지역민들도 이런 문화에 적극 동참하거나 아예 주도하고 나서면서 새로운 움직임들이 활발해지고 있다.
제주 세화포구 벨롱장 가보니
제주바다 담은 양초 등 인기
이주민들이 플리마켓 붐 이끌고
지역민들도 적극 나서 문화 공유
모두가 어우러지는 ‘용광로’로
지난 18일 저녁 제주시 아라동 옛 목석원 자리에 왁자지껄 장이 펼쳐졌다. 요즘 새롭게 뜨고 있는 플리마켓 ‘아라올레 지꺼진장’이다. ‘지꺼진’은 제주말로 ‘즐거운’이란 뜻이다. 2013년 농산물 직거래장터로 시작한 것이 올해 5월부터 플리마켓 형태로 확장됐다. 이곳에선 이주민과 지역농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예술품, 수공예품과 호박, 더덕, 버섯, 무화과 등 지역 농산물이 공존한다. 이주민과 관광객 중심의 벨롱장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손님들도 지역민들이 훨씬 더 많다.
농부 박정민(32)씨는 더덕과 도라지를 판다. 7살 때 부모님을 따라 울릉도에서 제주도로 옮겨온 그는 중산간 지역에서 더덕과 도라지 농사를 짓는다. “영농조합을 통해 주로 도매로 넘겨요. 여기서 팔아봐야 워낙 싸게 내놓아서 돈도 얼마 안돼요. 근데 여기 오면 사람들도 만나고 재밌으니까, 이렇게 매주 내려오죠.” 지역민들이 검은 비닐봉지로 한가득씩 사간다.
|
아라올레 지꺼진장에서 피자를 구워 파는 볍씨학교 아이들. 사진 서정민 기자
|
한쪽 구석 화덕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난다. 앳된 얼굴의 학생들이 메밀반죽으로 만든 묵은지피자와 고사리피자를 굽고 있다. 경기도 광명의 대안학교인 ‘볍씨학교’ 학생들이다. 중3이 되면 제주도 분교에 와서 열달을 지낸다. 지난 5월부터는 매주 여기 와서 피자를 구워 팔고 있다. 스스로 김치를 담그고, 고사리를 캐고, 화덕을 만들고, 장작을 팬다. 피자 판 돈은 중국으로 한달간 떠나는 졸업여행 경비로 쓸 계획이다. 박진희(15)양은 “부모님과 떨어져 친구들하고만 지내다 보니 첨에는 좀 힘들었지만 차차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
서귀포 예술시장에서 만난 리투아니아 출신 아그네 라티니테. 사진 서정민 기자
|
리투아니아 출신 아그네 라티니테(28)는 서울에 유학 왔다가 졸업 뒤 아예 제주로 내려왔다. “사람들이 가족처럼 지내는 게 좋아서”란다. 미술·애니메이션 등을 전공한 그는 12지신 동물, 해녀, 돌하르방 등을 나무에 그려 만든 열쇠고리, 엽서 등을 판다. “여기 와서 사람들 많이 사귈 수 있어 즐거워요.”
아라올레 지꺼진장은 매주 금요일 오후 5~8시 열린다. 장을 운영하는 문근식 e제주영농조합법인 대표는 “대부분 플리마켓이 주말에 열려서 금요일 저녁으로 차별화했다”고 말했다. “이곳 셀러들은 별로 못 팔아도 다음날 다른 데 가서 팔면 되니까 부담이 없어요. 절실하지 않은 장터라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셀러들도 밝은 표정으로 즐깁니다. 그러면 또 손님들도 즐겁고요. 이건 장사가 아니라 문화예요, 문화.”
|
제주 원도심 주민들이 스스로 여는 모흥골 호쏠장은 마을잔치 같다. 사진 서정민 기자
|
지역 공동체문화가 된 플리마켓은 또 있다. 제주시 원도심인 이도1동 소공원에선 매달 넷째주 토요일 오후 1~5시 ‘모흥골 호쏠장’이 열린다. 제주도 시조로 일컬어지는 고씨·양씨·부씨가 태어난 구멍이라는 ‘삼성혈’ 맞은편이다. 이는 이도1동 주민자치위원회가 주최한다. 주민자치위원인 문종태 리본제주 이사장은 “제주 원도심 주민들이 처음 스스로 플리마켓을 열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있는 원도심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추석을 앞두고 한 주 당겨 지난 19일 연 모흥골 호쏠장은 마을잔치처럼 훈훈한 분위기였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전을 부쳐 먹고, 가수인 주민이 통기타를 치며 노래했다.
같은 날 섬 반대편 서귀포시 이중섭거리에서는 ‘서귀포 예술시장’이 한창 열리고 있었다. 제주도 최초의 플리마켓이다. 2007년께 작가 4~5명이 자발적으로 모인 것이 점점 커져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는 1년 내내 주말마다 오전 11시~오후 6시 열린다. 김선화 서귀포 예술시장 대표는 “지역 상인들과 공존하기 위해 먹을거리는 최소화하고 예술품 위주로 판다. 여기 오래 나오다 보니 육지에서 오는 단골손님도 생겼다”고 말했다. 전날 아라올레 지꺼진장에서 만났던 아그네 라티니테가 ‘서귀포 예술시장’이라 새긴 주황색 티를 입고 웃으며 반겨주었다.
이날은 서귀포 예술시장이 200회를 맞은 날이었다. 손님들에게 준 행운권을 추첨해 셀러들이 자발적으로 내놓은 경품을 나눠줄 때는 왁자지껄한 축제 같았다. 오후 6시, 장이 끝났다. 이제부터 진짜 축제의 시간이다. 200회를 자축하는 ‘치맥 파티’가 열렸다. 셀러들은 물론 주변 상인과 지역주민들이 함께 모여 맥주잔을 부딪혔다. 제주의 플리마켓은 그렇게 모두가 어우러져 녹아드는 ‘용광로’가 되어가고 있었다.
제주 서귀포/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
제주 플리마켓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