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10.21 19:25 수정 : 2015.10.22 11:28

[매거진 esc] 김소민의 부탄살이

부탄은 콧대 높은 나라다. 개인 관광이 안 된다. 외국인은 여행사를 통해서만, 그것도 하루에 200~250달러 내야 들어올 수 있다. 그 값엔 가이드, 호텔 숙식, 교통비 따위가 포함된다. 그 이하로 쓸 사람은 놀러 오지 말란 거다.

이렇게 까탈스럽게 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부탄 헌법은 최소한 숲의 60%를 그대로 보존해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모든 정책의 근간인 ‘국민총행복’ 주요 항목 가운데 하나는 문화 보존이다. 이 둘에 관광객 많이 들어와 좋을 게 없다는 거다. 수는 줄이고 돈은 풀게 하자는 정책이다.

체류중인 외국인이야 히말라야 트레킹을 가이드 안 끼고 갈 수는 있다. 갈 테면 가보시라. 산이 큰형님이다. 저희들끼리 오르겠다는 불손한 외국인들은 그 큰형님이 다 손봐준다. 해발 4000m까지 텐트 지고 올라가보라. 게다가 이정표가 없다. 수도 팀푸 뒷동산만 가도 길 잃고 개 짖는 소리에 혼비백산 내려오기 일쑤다. 그러니 여행사에 손 벌리게 된다.

그래도 히말라야 콧바람은 쐬어봐야 하지 않겠나. 여행책에서 그나마 제일 짧고 쉬운 코스로 골랐다. 팀푸 근처 게니카에서 참강까지 가는 다갈라 트렉 4박5일 여정, 인원은 미국인 셋에 나 포함 넷이다. 값이 셌다. 하루에 100달러다. 거의 ‘귀족’ 등산이다. 말 7마리, 요리사 1명과 보조, 가이드가 따라간다. 이 외국인들은 제 몸만 끌고 가면 되는 거다.

제 몸이 원수다. 빗물과 설사가 주르륵주르륵 흘렀던 똥 트레킹의 시작이다. 해발 2800m 팀푸에 살다 보니 고산병은 안 걸렸는데, 고도가 올라갈수록 허파가 목젖까지 바짝 차고 올라왔다. 하루에 5~6시간씩 걸었는데 이보다 문제는 창자였다.

우리 요리사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한 끼에 반찬이 3가지다. 첫날 고사리, 버섯, 치즈에 감자를 넣은 ‘케와다치’가 나왔다. 처음엔 우와, 달려들었다. 이튿날 케와다치, 고사리, 버섯이, 그다음날 버섯, 고사리, 케와다치가 나왔다. 말이 한정 없이 지고 올라갈 수 없다 보니 조삼모사 되는 거다. 요리사는 지치지 않고 부탄 요리를 만들었고, 나는 컵라면 한 젓가락에 영혼을 팔 수 있을 거 같았다.

사흘째 되는 날부터 재난이 벌어졌다. 네명 중 셋이 안절부절못했다. 설사대란이다. 그 전까지 나는 자연 속에선 항문이 자동폐쇄됐다. 그 법칙이 설사병 하루에 다 깨졌다. 셋째 날 밤은 잔인했다. 장은 더할 나위 없이 까다롭게 굴었다. 숲속의 밤은 깊었다. 개까지 어디서 나타나 짖어댔다. 항문과 사투를 벌인 다음날 우리는 속력을 냈다. 어느 때보다 날쌨다. 이것은 설사와 요리사로부터의 탈주였다.

설사로는 부족했던 걸까. 우기의 끝자락을 잡았다. ‘트루밥’이라는 ‘성스러운 비의 날’이 걸렸다. 그날 모든 물방울은 축복이다. 그 물방울을 맞으며 ‘티티티’ 소리를 내면 죄가 씻긴다. 부탄 사람들은 전날 밤 물을 받고 꽃잎을 띄워 밖에 둔다. 달의 정기까지 담은 그 물로 ‘트루밥’ 날 씻는다. 나는 지금 아주 순결하고 앞으로 10년간 죄지어도 된다. 미친 듯 비 맞았다. 원래는 보였어야 할 히말라야 설산들이 싹 다 사라졌다.

야크 유목민 집의 방 한 칸. 사진 김소민 제공
그 빗속에서 신기루처럼 야크 유목민 집이 나타났다. 안개구름 속에서 짧은 머리 아주머니가 땔감 몇 개를 안고 엄청난 슬로모션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손가락도 장작 같다. 그가 우리를 스쳐 돌덩이를 올려 만든 집으로 내려갔는데, 그것이 바로 초대였다. 사위, 딸, 6살 손자와 4살 손녀를 뒀다. 다 볼이 발그레하다. 야크 젖을 짜 치즈, 버터를 만든다. 야크를 죽이진 않는다. 그건 죄란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요.” 방 한 칸이 다다. 벽엔 국자 네 개와 냄비 두 개 걸려 있고 선반엔 쌀 볶아 만든 ‘자오’가 있다. 전기는 없다. 시계, 가스레인지 아무것도 없다. 태양열 충전식 라디오 하나 달랑 있다. 다섯달 여름을 여기서 난다. 방 가운데서 나무를 때는데 그 불로 이 처음 보는 외국인들에게 가족은 버터티를 끓여 줬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우리 여행을 뒷받침해주는 스태프 가운데도 유목민 마을 출신이 있었다. 스태프 중 서열 꼴찌, 심부름꾼 도지(25)다. 도통 말이 없다. 1년 전에 돈 벌 수 있다는 친구 말 따라 수도 팀푸로 왔다. 그때부터 하루에 1000눌트룸(약 1만7천원)을 받고 여행객 뒷수발을 했다. 30㎏ 넘는 등짐을 진 도지가 면 점퍼 하나 입고 빗속을 걸어 점심상을 차려 놓으면, 고어텍스 점퍼를 입고 몸만 달랑 가는 우리 외국인 관광객은 먹기만 하면 됐다. 도지가 답을 안 해줘 가이드 체링에게 “왜 도지가 고향을 떠났을까” 물으니 그런다. “요즘 누가 산에 살고 싶어해요? 다 도시로 가려 하죠.”

히말라야가 그리 속이 좁지는 않나 보다. 마지막날 새벽, 가이드 체링이 급하게 깨웠다. 먹구름이 찢어진 그 사이로 보였다. 그 신들이 사는 봉우리들. 우리는 그렇게 모두 하찮았다. 그 하찮은 우리는 그 안에서도 나뉘었는데, 맨 위엔 서비스를 즐기는 외국인 관광객, 맨 아랜 고향을 떠난 청년 도지가 있었다.

그렇게 하찮은 우리는 모두 그 산 앞에서 넋이 나가 말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 방귀를 뀌었다. 나도 장에서 신호가 왔다. 우리는 누구나 똥을 누는 것들이었다. 이 아름다운 땅에 우리는 누구나 똥을 눌 축복을 받고 태어났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