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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0.21 20:31 수정 : 2015.10.22 11:26

[매거진 esc] 양윤정의 패션을 부탁해

2008년 가수 장기하의 등장은 여러 면에서 신선하고 놀라웠다. 귀에 슬쩍 걸리는 독특한 창법, 기묘하게 어긋나는 멜로디와 박자, 생활밀착형 가사에 몹시 가내수공업적으로 완성된 음반은 단숨에 20~30대를 휘어잡았다. 그는 싸구려와 잉여를 부르짖으며 들어본 듯 들어보지 못한 듯한 오묘한 음악을 선보였고, 자기만큼이나 독특한 멤버 ‘얼굴들’로 구성된 록 밴드를 이끌고 있었는데, 동안은 아니지만 말끔한 외모에 어눌한 듯 할 말 다 하는 말솜씨도 예사롭지 않았다. 게다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놀람과 부러움이 더해졌다. 7년이 지났다. 장기하는 ‘인디계의 서태지’, ‘숨은 고수’, ‘인터넷 대세’로 시작해 지금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밴드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장기하의 데뷔부터 내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것은 그의 음악과 잘 어울렸던 패션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은 표면적으로 록 밴드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1970년대 사운드에 쿵짝쿵짝 쉽게 발 박자가 맞춰지고 귀에 착착 감기는 복고풍이다. 이런 특징은 패션에도 잘 드러나 있다. 장기하에게서는 록 밴드 리드보컬 특유의 패션, 즉 꽉 끼는 가죽 블루종(등이 불룩하거나 길이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점퍼)과 몹시도 반짝이는 은 액세서리, 긴 생머리를 찾아볼 수 없다.

‘싸구려 커피’를 부를 때다. 그는 단정하고 심플한 재킷이나 셔츠를 선택했는데, 심지어 셔츠의 단추를 목까지 채우고 넥타이도 마다하지 않았다. 거기에 검은색 플라스틱 프레임의 안경까지 더했다. 이런 그의 패션을 ‘복고풍 클래식’이라 부를 수 있겠는데, 막 제대하고 복학이라도 한 것 같은 그 모습은 사실 단정함을 넘어서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패션만 놓고 보자면 직장인 록 밴드 같았다고 하면, 실례일까? 이 수상한 패션은 무언가, 라고 느낄 즈음 그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답답한 모범생 옷차림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며 열창하는 모습은 대단한 반전이었다. 패션과 노래의 낯선 조합으로 장기하의 매력은 폭발했다.

검은색과 베이지가 섞인 하운드투스 체크 패턴(개의 이빨이 늘어선 것처럼 보이는 큰 체크 무늬)의 슈트를 선택한 장기하. 사진 <한국방송> 화면 갈무리
장기하의 진화한 패션은 최근 방송된 <한국방송>(KBS)의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확인된다. 아이유와의 열애를 인정한 뒤 첫 방송 출연이라 모든 게 평소보다 더 신경쓰였을 터. 그는 검은색과 베이지가 섞인 하운드투스 체크 패턴(개의 이빨이 늘어선 것처럼 보이는 큰 체크 무늬)의 슈트를 선택했다. 체크 패턴의 슈트는 옷 좀 입는다는 아이돌도 꺼려하는 난해한 아이템이다. 설령, 그나마 소화하기 쉬운 타탄체크(여러 겹으로 겹친 체크 무늬) 셔츠를 입는다 해도 하의는 단색을 선택해 시각적인 복잡함을 덜어내려는 것이 보통인데, 장기하는 아예 아래위 한벌을 체크로 입었다.

이 시도는 재킷 안에 입은 아이보리색 터틀넥이 고요하게 체크 패턴을 받쳐주면서 성공했다. 가지런히 내린 그의 앞머리는 복고풍 패션을 절정으로 이끌었는데, 얼굴만 좀 서구적이었다면 영국의 어느 명문대생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여기에 소매를 살짝 걷어 올려 활기를 더하고, 정장 로퍼가 아닌 운동화를 신어서 세련미를 더했다. 검은 테 안경도 벗었다. 많은 액세서리나 복잡한 치장은 체크 스타일링을 지저분하게 보일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양윤정 전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 편집장
장기하는 데뷔 때부터 꾸준히 복고풍 클래식 패션을 고수한 결과 7년 전과 다름없는 외모로 보이는 데 성공했다. 12살의 나이차를 극복한 연애도, 남부럽지 않은 스펙도, 독특한 창법도 안 된다면 옷은 장기하만큼 입어볼 만하지 않은가. 이 가을, 체크 패턴이 보통의 남자들을 구원할지도.

양윤정 전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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