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1988 여행 / 1989년 가족 나들이 장소 고민하는 김 대리와 박 대리의 갑론을박
※ 이 기사는 1989년 신문에 실리는 걸 가정해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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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월드 개관 초기 퍼레이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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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아무래도 새로 생긴 데가 더 낫지 않냐? 가깝고, 기깔난 놀이기구도 많고, 실내공원이니 얼라들 놀기도 좋고.”
“야외 나들이 쫌 해보자니까. 마누라들 콧구녕에 바람도 집어넣고, 애들 동물 구경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놀게 하려면 바깥이 좋잖아.”
30대 초반 회사원으로 고교 동창인 김 대리와 박 대리는 일주일째 퇴근길 승용차 안에서 갑론을박 중이다. 김 대리는 얼마 전 새로 개장해 세간의 화제로 떠오른 롯데월드로 가자는 거고, 박 대리는 모처럼의 두 가족 나들이니, 드라이브 겸 용인 자연농원으로 가자는 주장이다. 둘은 본격 여름휴가에 앞서, 주말 가족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두 집 아이들이야 각각 3살, 4살배기로 아직 어려서 선택권이 없고, 애 엄마들은 “어디든 나가기만 하면 다 좋다”며 일찌감치 아빠들에게 장소 선택을 위임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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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자연농원(현재 에버랜드)에서 1987년 8월8일 열린 엠비시(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 모습. 송창식·이선희·이문세·구창모·노사연·벗님들·김범룡·김완선·유열·최성수 등 당시 인기 가수들의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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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과 박은 서울 쌍문동 같은 골목에 산다. 다니는 회사가 다르긴 해도, 서울시내 한복판인 무교동과 시청 주변에 있어 출퇴근을 함께 하는 때가 많다. 특히 무역회사에 다니는 박 대리가 얼마 전, 마침내 근사한 자가용을 떡하니 장만하면서 둘은 출퇴근을 같이 하는 때가 잦아졌다.
차가 종각과 종로서적을 지나 허리우드극장 앞 네거리 신호등에 걸리자 박 대리가 88라이트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인마, 드라이브 좀 해보자고. 새 차 길들이려면 한번 세게 밟아줘야 하거든.” 출퇴근이든 외식이든 움직일 때마다 번번이 박 대리 차를 얻어 타는 김 대리로서는,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한편 자존심도 상한다. 마음 같아서야 지하철 타고 롯데월드나 다녀오면 딱이다. ‘시가 잭’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며 김 대리가 대꾸했다. “니도 참, 고집 한번 세다. 롯데월드가 개장 기념으로 재밌는 행사도 엄청 마이 한다드라.”
차가 ‘젊은이들의 해방구’ 대학로로 들어서 지하철 4호선 혜화역을 지난다. 김과 박은 얼마 전까지 지하철로 출퇴근했다. 생각해보면 4년 전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되면서, 서울시내 교통은 정말 편해졌다. 쌍문역에서 타고 동대문운동장역에서 2호선을 갈아타면 을지로입구역까지 30분대이니, 그야말로 ‘따봉’이다. 10여년 전 서울에 지하철이 생긴 이래 노선이 벌써 4개다. 서울시내 구석구석을 잇는 ‘거미줄처럼 얽힌’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 어지럽기까지 하다.
한국판 디즈니랜드 롯데월드 개장
세계 최대 실내 놀이공원 기록도
자연농원은 사파리·장미축제 유명
겨울엔 대형 눈썰매장도 개장
그럼에도 김 대리가 지하철 대신 박 대리 자가용을 타는 건 “한동네 사는데 당연하다”는 박 대리 생각도 생각이지만, “교통비 좀 절약해보자”는 아내의 권유를 무시할 수 없어서다. 그리고 때는 바야흐로 ‘마이 카 시대’ 아닌가. 박 대리 차는 최신형 소형 세단, 엑셀 1500㏄다. 박 대리는 애초 ‘차체가 탄탄하다’고 알려진, 1300㏄ 프라이드를 살 생각이었다. ‘동력자원부’의 시내주행 테스트에서 1ℓ로 무려 16.79㎞를 달려, ‘국내 승용차 중 연비가 1위’란다. 박 대리는 ‘기름 1ℓ 466원 기준으로, 하루 1000원 남짓이면 출퇴근이 가능하다’는 광고에 혹했다. 하지만 박 대리 아내가 “남들처럼 뒤꽁무니(트렁크) 튀어나온 ‘쎄단’ 좀 굴려보자”고 고집하는 바람에, 현대 포니엑셀의 후속모델로 나온 엑셀과 대우 맵시나의 후속 모델인 르망을 후보로 올려놓고 고민한 끝에, ‘1.5 GLSi 수동5단’ 잿빛 엑셀을 골랐던 거다.
차는 삼선교 나폴레옹제과를 거쳐 돈암동 태극당 앞을 지나 점집·보살집 즐비한 미아리고개를 오른다. “아우, 저기 중학교 때 가던 호떡집 아직도 있네. 꿀호떡 끝내주잖아.” “난 팥호떡이야, 인마.” 둘은 미아리삼거리 대지극장 앞을 지나며 나들이 장소를 놓고 한바탕 더 갑론을박했지만 평행선을 달렸다. 오늘도 결론을 못 내리고 집으로 가게 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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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 롯데월드 어드벤처 개관 당시 주변 모습. 새나라백화점(롯데백화점 잠실점 전신) 건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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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각각 롯데월드와 용인 자연농원을 고집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먼저 김 대리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롯데월드는 한국판 디즈니랜드로, ‘세계 최대 규모의 실내 놀이공원’이란다. 거대한 화산 모형도 있고, 어린이열차도 있고, 롤러코스터도 있다. 알라딘보트·로마전차·곡예전망차·고공전투기 등등 좌우간 아이든 어른이든 가보면 환장하는 최신식 놀이시설이 무려 18가지나 되는데, 백화점까지 연결한 모노레일도 있어 쇼핑도 즐길 수 있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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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용인자연농원의 장미축제 및 ‘이종환의 디스크쇼’ 공개방송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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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리의 주장도 만만찮다. “뭐, 자연농원엔 놀이기구가 적은가. 있을 건 다 있다. 거기다가 호랑이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호랑이 사파리도 있고, 물개쇼·홍학쇼·공작쇼까지 애들 보여줄 게 정말 많다. 장미축제 대단하다더라. 디스코장처럼 번쩍번쩍 조명 밝히고 야간개장도 하고. 겨울엔 엄청나게 큰 눈썰매장도 하잖아.”
왼팔을 차창 밖에 폼나게 걸치고 한손으로만 운전하던 박 대리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카 라디오’를 틀었다. 올해 내내 텔레비전·라디오 전파를 타고 있는 이상은의 ‘담다디’가 또 나온다. 김 대리는 회사 앞 신문가판대에서 산 <한겨레신문>을 펼쳤다. 요즘 뜨거운 이슈는 안기부의 한겨레 편집국 압수수색 사태와 서경원 의원, 임수경양 등의 잇단 방북사건이다. 김 대리가 평소 즐겨 보는 건 박재동의 한컷 만화다. 특히 노태우 정권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만화는 통쾌하기 이를 데 없다.
노태우 하니, 생각나는 게 있다. “너, 요즘 노태우 유머 아나?” “물태우 얘긴 왜?“ “노태우 삼행시 말이다. 노, 노태우입니다요. 태, 태도가 나빠도 믿어 주세요~. 우, 우습죠? 킥킥.” “하나도 안 우습다. 너 이건 아냐? 한 등산객이 산골 초가집에서 흘러나오는 얘길 들었대. ‘어머니, 드실 게 없으니 어쩌죠? 이거라도 드세요.’ ‘할 수 없구나. 그거라도 좀 먹자.’ 등산객이 쌀봉지를 꺼내들고 들어가니, 시어머니가 막 똥을 먹고 있더래. 며느리랑 화투 치고 있더란다.” “하하, 한물간 참새 시리즈, 식인종 시리즈보단 낫구나.”
차가 ‘심령대부흥회’ 현수막들이 요란하게 내걸린 교회를 지나 집 부근 골목으로 들어설 무렵, 극적인 막판 타결이 이뤄졌다. 박 대리가 결심한 듯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 이렇게 하자. 반공일(토요일)엔 퇴근 뒤 롯데월드 가고, 공일(일요일)엔 자연농원 가자. 내친김에 둘 다 가는 거야. 어때?” “음, 아싸리 그래버릴까?” “돈이 좀 들겠지만, 까짓것 자연농원에선 내가 다 쏠게.” “집사람들도 좋아하겠네. 오케이.”
집사람들에게 점심용 김밥을 싸달라고 하기로 했고, 사진기는 박 대리가 가진 미놀타를, 필름은 김 대리가 사기로 했다. “야, 필름 넉넉히 준비해라. 기념사진도 많이 박아두자.” “코닥이나 후지필름 서른여섯방짜리로 세통이면 되겠지?” 김 대리가 한마디 더 했다. “찍은 필름은 돌아오자마자 사진관에 맡기는 거 알지?” “알지. 이젠 조심한다.” 지난봄 어린이대공원에 놀러갔다 온 뒤, 애써 찍은 필름을 아이들이 가지고 놀며 죽죽 다 뽑아버렸기 때문이다. 건진 사진이라곤 빛이 들어가 희부옇게 된 마지막 한 컷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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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월드 개관을 앞두고 1989년 각 일간지에 실렸던 전면광고. ‘세계 최대 규모의 전천후 실내공원 롯데월드 어드벤처의 탄생’을 알리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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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번 주말 나들이 장소가 정해져 다행이다. 연탄재 가득 쌓인 시멘트 쓰레기통 옆에 차를 바짝 붙여 댄 뒤 박 대리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야, 그나저나, 올해 바캉스는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태국·인니·자유중국으로 나간다는 사람도 있던데, 우리야 엄두가 안 나고.” “음, 계곡 중엔 설악산 계곡이 최곤데, 백담사에 전두환이가 버티고 있으니….” “일반인들은 근처에도 못 오게 한다더라.” “대학생들이 ‘전두환 체포조’를 만든다는 소문도 있던데, 빨리 끌어내든지 해야지, 원. 그 인간 때문에 백담사 계곡이 더 가고 싶어지네.” “낼 보자.”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사진 에버랜드·롯데월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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