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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홍창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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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홍창욱의 제주살이
여행객에게 혹은 제주에 이주한 신입 도민들에게 제주는 따뜻한 ‘남쪽 나라’다. 제주공항에 내리면 아열대 기후의 야자수가 떡하고 버티고 있으니 말이다. 여름이면 수영복이나 바닷가 패션이 잘 어울리지만, 당신이 도착한 계절이 겨울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특히 올해 같은 겨울은. 얼마 전 제주에 눈이 많이 내렸다. 제주시에 살 때는 서귀포 회사로 출근하며 스노체인을 챙겼다. 제주시~서귀포 중문을 잇는 고속도로인 ‘평화로’가 고지대다 보니 눈이 많이 오기 때문이다. 3년 전 서귀포로 이사한 뒤로는 체인 걱정을 한 적이 없는데, 이번 눈은 달랐다. 거의 닷새 동안 눈이 쉴 새 없이 내리는데, 그냥 눈도 아니고 함박눈이 쏟아졌다. 때마침 딸네 집에 쉬러 왔다가 전주로 돌아가려던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모바일 교통 정보를 시시각각 확인하며 불안해하셨다. 폭설로 인한 결항 가능성도 있어서 비행기를 연기해야 하나, 제시간에 공항에 반납해야 하는 렌터카는 또 어쩌나 고민하던 중, 제주 눈길에 익숙한 사위가 두 분을 모시기로 하고 출발 당일 아침, 차를 몰았다. 사실 제주에 사는 사위 또한 눈길 운전 경험이 많지 않았고, 남쪽 나라에서 갑작스러운 추위에 얼어 죽는 사람이 더 많은 것처럼 대비도 철저하지 않았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그나마 폭설 전 간간이 내린 눈길에 스프레이 체인 효과를 톡톡히 봤기에, 그것에 의지해 길을 나섰다. 해안선 동네 따라 나 있는 일주도로에서부터 전날 나왔다가 미끄러져 어딘가에 부딪힌 차들이 여기저기 서 있었다. 제주의 견인차란 견인차는 모두 나왔는지 다들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폭설엔 대중교통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차피 렌터카를 제주시에 있는 공항에 반납해야 했기에 무조건 직진, 직진밖에 없었다. 언제 어디서 사고가 나도 이상할 게 없는 와중에도 차창 밖으로 하염없이 내리는 대설이 너무 아름다워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길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혹은 우리처럼 제때 반납해야 하는 기구한 운명의 ‘허’자 번호판(렌터카)만이 비상등을 깜빡이며 거북이 운행을 하고 있었다. 장인어른은 “도로 상황이 안 좋아 보이니 일주도로로 안전하게 가자”고 했지만, 이런 빙판길이라면 일주도로로 언제 공항에 도착할지 장담할 수 없는지라 결국 평화로 입구에서 상황을 보기로 했다. 간신히 당도한 평화로 초입에서 만난 제설차량이 구세주처럼 반가웠다. 평화로는 중문관광단지를 잇는 고속도로여서 차량 운행이 많다 보니 그나마 도로 사정이 나은 편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정주행하여 도착한 제주공항, 렌터카를 반납하던 중 우리가 내지도 않은 스크래치에 수리비를 요청하는 바람에 잠시 상황을 해결하는 사이 공항 출발층에 먼저 내렸던 장모님이 여행가방을 끌고 되돌아오는 게 아닌가. 이번엔 군산공항 폭설로 인한 비행기 결항. 셋이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서귀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 짐칸에 실은 장모님 여행가방이 다른 사람 것과 바뀌어서 다시 차를 몰고 서귀포 시내 한 바퀴. 그날 이후로도 나는 새벽 출근길에 만난 폭설로 강제 휴가를 받아야 했고, 다음날은 버스 출근길에 내가 탄 버스가 눈길에 미끄러져 승용차와 부딪히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실로 다사다난했던 며칠을 겪고 나니 모슬포 바다에 북극곰이 나타났다고 해도 믿을 것 같고 산타 할아버지가 유치원 버스를 몰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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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욱 <제주, 살아보니 어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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