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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2.17 18:33 수정 : 2016.02.18 10:41

[매거진 esc] 김소민의 부탄살이

소남의 넉달 된 딸 나르셀은 좀체 우는 법이 없다. 이 애는 전생에 ‘소’였단다. 그러고 보니 달 없는 밤 같은 깊고 까만 눈이 닮았다. 부모는 아기가 태어나면 친구들을 불러다 ‘창게’라는 술을 마신다. 막걸리 같은데, 대체 왜, 계란을 팍 풀었다. 이 술이 달면 애 인생도 달콤하게 풀린다고 믿는다. 이 창게를 퍼주면서 나르셀 엄마가 말했다. “하여간 여자애들은 다 전생이 동물이라니까.” 애 태어난 시각, 날짜를 알려주면 점성술사나 스님이 ‘키치’라는 문건을 써주는데 거기 전생부터 앞으로 인생 굴곡이 적혀 있단다. “나르셀이 이번 인생에 복을 많이 지으면 다음에도 사람으로 태어날 거고, 이번 인생에 죄를 많이 지으면 새가 될 거래.” 나는 죄도 실컷 짓고 새가 되는 게 남는 장사인 거 같았다.

한 시민단체 대표인 탄딘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사회학 석사를 받았다. 그는 자기 딸이 전생에 뱀 나라인 ‘나가’의 공주였다고 생각한다. 믿으려 작심하면 증거야 널렸다. 임신했을 때 탐스러운 뱀이 과일처럼 주렁주렁 걸린 꿈을 꿨다. 스님이 써준 ‘키치’에도 그렇게 나온다. 게다가 딸은 탄 음식이라면 기겁하는데 그게 다 ‘나가’ 나라 뱀의 특징이다. 그가 ‘키치’를 우스개 반 진담 반 하며 대체로 믿는 까닭은 자기 팔자 때문이란다. “40살까지 무지 고생한다고 그랬거든. 남자 잘못 만나서. 내가 딱 그렇잖아. 그래도 이 생에서 좋은 일 많이 해 공덕을 쌓아야지, 잘못하면 다음 생에 닭으로 태어난다고 했어.”

모든 아기에게는 ‘수호 절’이 있다. 아기가 태어나면 이름은 각 지역 대표 절(라캉)에서 스님한테 받는다. 때론 스님이 일이 바쁜 건지 깊은 뜻이 있는 건지 형제 넷 이름을 똑같이 붙여주기도 한다. 하여간 이름을 주는 라캉은 일종의 심리적 둔덕이 돼준다. 애가 아프거나 인생이 꼬이면 그 지정 라캉에 가서 공양이라도 드려볼 수 있는 거다. 반대로 공양을 소홀히 했다간 애가 병나는 수 있다. 그래도 큰 액운이 닥치면 ‘공양을 소홀히 했구나’. 말이 되건 안 되건 이유라도 있는 게, 속수무책 어처구니없게 당하는 것보다는 견디기 낫지 않을까. 그런데 요즘은 자기 ‘지정’ 라캉에 가기가 그리 쉽지 않다. 젊은이들이 고향을 떠나 수도 팀푸로 몰려들기 때문이다. 푼조(25)도 동쪽 끝 타시강에서 팀푸로 와 여행가이드로 일한다. 고향 절에 공양 못 드려 화가 닥치면 어떻게 하냐니까 걱정 말란다. “어머니가 하루가 멀다고 그 절에 가 기도하시는걸요.”

공양으로는 성이 안 차는지 부탄의 아이들은 구루 림포체 등 고승들의 초상화를 담은 목걸이를 걸고 다닌다. 나르셀은 목걸이가 무려 세개다. 평생 나르셀을 지켜줄 목걸이다. 한발짝 앞을 볼 수 없는 인생이니 부모는 목걸이에라도 의지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화장터. 사진 김소민 제공
별별 공양도 목걸이도 죽음 앞에서야 별수 없다. 오전까지 멀쩡하던 지왕의 아버지(54)는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더니 오후에 숨졌다. 그는 주검으로 다시 아기가 됐다. 장례를 치르는 날 화장터(사진)에 가보니 장작더미가 다섯개다. 장작더미 속에 시신이 있는 줄 몰랐다. 부피가 너무 작았다. 같이 간 친구 예시가 그런다. “뼈를 꺾어서 몸을 작게 만들고 흰 천으로 덮어서 그래.” 다섯 구 가운데 두 구 위에는 노란 천으로 장식한 캐노피가 올려져 있다. 다른 세 장작더미엔 천만 덮었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마지막으로 받는 밥상도 달랐다. 캐노피 장식 앞에 차린 밥상엔 찬이 두세개 더 있다. 돼지고기 요리 팍샤도 비계가 더 실하다. 밥상이 놓이자 개들이 몰려들었다. 새끼 치는 철인지 강아지가 떼로 모였다. 살아 있는 것들은 징그럽게 배가 고팠다. 문상객들이 쫓았지만 개들은 돌아서는 시늉만 하다 다시 킁킁거렸다.

“술 때문이야.” 지왕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소곤거렸다. 군부대 배관공이었는데 직장을 잃고 난 뒤 몇년째 일이 없어 술만 마셨다 했다. 지왕 엄마가 호텔 청소로 생계를 책임졌다. 대학을 졸업한 지왕도 직장을 못 구해 벌이가 없다. 지왕네는 장작 살 돈이 없어 왕에게 청원했다. 왕 덕분에 다행히 전기 소각로에서 아버지를 보내지 않게 됐다. 스님들이 불경을 읊고 영혼을 떠나보낼 예식을 치를 시간이 없기 때문에 빨리 타는 전기 소각로는 정말 땡전 한푼 없지 않고서야 꺼린다.

누구 문상을 왔건 그날 장례 치르는 모든 주검 앞에 똑같은 액수로 부조를 내야 한다. 불경을 읊던 스님은 버터와 우유, 밀가루를 섞은 덩이를 조금씩 뜯어 다섯 더미에 똑같이 뿌렸다. 자식들이 부탄 술 아라를 장작더미 위에 몇번 붓더니 불을 붙였다. 두 시신을 장식했던 캐노피는 금세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지왕과 문상객들은 아버지를 품은 장작더미 주위를 돌았다. 타닥타닥 세 시간쯤 지나자 다섯 구 모두 그저 재만 남았다. 상주는 이 재를 모아 화장터 뒤 흐르는 강에 떠내려보냈다. 눈이 벌건 지왕이 말했다. “슬퍼할 일은 아니야. 아버지가 다음 생엔 더 행복하게 태어나길 바랄 뿐이야. 그런데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네.”

좋은 날을 받아 지왕 가족과 친구들은 흰색 기도 깃발이 날리는 108개 장대를 바람 잘 부는 절벽에 세울 거다. 그 깃발에 적힌 만트라와 함께 아버지의 영혼도 허공에 흩어지겠지.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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