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을지로
도심 공동화로 빈집 늘어가는 산림동 조각골목에 젊은 예술가들 들어와 활력 충전
해와 달이 서로 마주 보던 19일 늦은 오후, 서울 중구 산림동엔 사람보다 집이 더 많았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엔 문 닫힌 빈집뿐이었다. 학창 시절 지리 시간에 배운 ‘인구 공동화’가 떠올랐다. 처음엔 공동화가 ‘공동체’라는 말처럼 좋은 뜻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도심이 도넛 가운데 구멍처럼 뻥 뚫려 비어 있다는 말이었다.
북쪽의 청계천, 남쪽의 을지로3·4가 사이에 위치한 산림동엔 금속을 깎거나 연마해 상패 등을 제작하는 이른바 ‘조각 공장’과 각종 기계 부품을 만드는 기계·정밀 공장이 550여곳 몰려 있다. 동 한가운데에는 종로의 세운상가와 이어지는 청계·대림상가가 위치해 있다.
공동화가 심해진 산림동은 아예 슬럼화된 상태였다. 청계상가 입구에는 ‘흥분제’ ‘몰카’ ‘도청기’ 등을 판다는 간판이 버젓이 걸려 있었다. 서울 강남역에 오피스텔 성매매를 한다는 전단이 뿌려지는 세상이지만,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이런 불법 제품을 판다는 정식 간판이 붙어 있는 모습은 생경했다.
청계상가 옆 90년이 넘었다는 한 적산가옥(일본식 집)을 끼고 골목에 들어서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직 해는 떠 있는 상태였지만,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골목은 들어갈수록 더 깊어졌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에 나온 공장도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영화 속 그 분위기였다. 낮에는 그나마 공장이 문을 열어 사람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주말 저녁이 되니 모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맞은편에서 오는 넝마주이가 반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골목을 따라 15분 정도 걸었더니 불이 다 꺼진 골목길에 유일하게 불이 켜진 2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 건물로 20대 젊은 남녀들이 드나들었다. 대체 뭐 하는 곳일까?
젊은 예술가들 하나둘씩 모여들다
겉으로 봐선 그저 낡은 2층 건물이었다. 사람 하나 겨우 올라갈 정도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니 그 안은 다른 세상이었다. 밖은 산림동이지만, 안은 서울 ‘홍대’였다. 최근 유행하는 노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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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의 젊은 작가가 모여 만든 전시관 겸 작업공간 R3028이 19일 개관 파티를 열었다. 이정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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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물 받아들인 젊은층 예술 싹터
70년대 산업화 시대 다시 한번 부흥
90년대 들어 쇠락했다 최근 기지개 일제강점기 ‘모던뽀이’들의 주 무대 이 지역의 옛 이름은 ‘구리개’다. 일대에 누런 진흙으로 된 낮은 언덕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갑오개혁 뒤 한자로 옮겨 ‘동현동’으로 바뀌었는데, 일제는 이를 다시 ‘황금정’으로 바꾸었다. ‘동’(洞)은 조선식 행정구역이고, ‘정’(町)은 일본식 지명이다. 지금의 명동인 ‘혼마치’(本町·본정)가 대표적인 일본식 지명이다. 명동은 을지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황금정 일대는 해방 직후인 1946년 정부가 대대적으로 일본식 동명 정리 사업을 하면서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딴 을지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인근의 충무로도 이순신 장군의 호를 딴 것이다. 일제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은 북촌, 남쪽은 남촌이라 불렀는데, 일본인 거주 지역을 조성하기 위해 남촌을 집중적으로 개발했다. 종로 일대의 북촌 민족자본과, 일본인 거주지로 개발된 남촌 식민지자본의 대결구도가 펼쳐진 것이다. 당시 남촌은 지금 서울 강남에 해당한다. 신식 문물을 받아들인 ‘모던뽀이’와 ‘모던껄’의 주 무대가 바로 이 남촌이었다. 모두들 한복을 입던 시절 양복을 입고 ‘딴스홀’을 출입하던 모던뽀이와 모던껄들은 당대 ‘퇴폐의 상징’이라며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의 근대 문학과 예술이 싹튼 곳도 바로 여기다. 혼마치부터 황금정으로 이어지는 을지로는 ‘모던의 상징’이었다. 당시 황금정이 어느 정도 번화했던 곳인지 나타내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1935년 5월11일치 <동아일보>를 보면 “조선광업 개발회사가 공사비 300만원을 들여 황금정에 8층짜리 조선 제일의 빌딩을 짓는다”는 내용의 기사가 있다. 조선 최고층 빌딩이 들어설 정도로 자본과 문화가 집중된 곳이 바로 을지로였던 것이다. 을지로는 광복 이후 1970년대 산업화 시절 다시 한번 부흥기를 맞게 된다. 무엇이든 만들기만 하면 돈이 되던 시절, 제조업의 중심지였던 을지로에 사람과 돈이 몰린 것이다. “을지로가 돈을 쓸어담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하지만 건물이 본격적으로 낙후하기 시작한 1990년대 들어 급속한 슬럼화가 시작됐다. 돈이 돌지 않으니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빠져나갔다. 근대의 그늘이 드리운 을지로 골목길에 최근 모던뽀이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예술가들의 천국…원주민들도 “반갑다” 산림동 일대를 취재하던 도중, 서울 성수동에 작업실이 있다는 디자이너 2명을 길에서 만났다. 그들은 “이곳 임대료가 몇만원 수준”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금 작업실 임대료가 80만원”이라고 밝힌 그들은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다. 들어올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말했다. 작업공간이 절실한 이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임대료를 지원하는 지자체 정책도 한몫했지만, 예술가들이 이곳에 둥지를 트는 또다른 이유는 ‘을지로’라는 공간이 주는 정서와 이점 때문이다. 국내 미술 전공 학생들은 을지로를 수시로 드나든다. 이곳에 아크릴, 금속공예, 인쇄 등 작품 만드는 데 필요한 업체가 몰려 있다. 고대웅 작가는 “일반인에게 을지로는 낙후된 도심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미술 전공 학생들에겐 고향 같은 곳이다. 작품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거나 작업을 발주하기 위해 수시로 드나들던 곳”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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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을지로3·4가 사이에 위치한 산림동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고 있다. 도자기 예술 작품을 만드는 퍼블릭쇼(을지 1호) 앞 골목길을 한 시민이 걷고 있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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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기록관(을지 5호)의 이현지 작가.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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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조형(을지 3호)의 소동호 작가.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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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클활동(을지 4호)의 최현택(왼쪽), 조민정 작가.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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