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3.30 18:53
수정 : 2016.03.3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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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 운전면허 학원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수강생들. 김소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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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소민의 부탄살이
부탄 운전면허 학원을 다니다 득도할 거 같다. 이곳이 실은 운전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인내를 단련하는 곳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수동 기어 차를 몰려니 엄두가 안 나 학원에 등록했는데 이러다 도인이 돼 날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첫날 시뮬레이터로 연습해야 했다. 딱 두 대 있는데 한 대는 망가졌다. 수강자는 12명이다. 한 사람이 5분씩 전자오락기 같은 시뮬레이터 앞에 앉아 차를 모는 시늉을 했다. 칼같이 5분씩만 한다 해도 60분인데, 또 강사가 설명을 하네, 질문이 있네, 시동이 꺼졌네, 하며 시간이 간다. 두 시간 기다렸다. 몸속 시한폭탄이 째깍거렸다. 평정심 유지하려고 책을 폈는데 한 시간 넘어가자 눈에 헤드라이트 켜졌다. 그런데 외로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눈 돌아간 사람 나밖에 없다. 이 12명은 대체 뭔가. 학원에서 고용한 사람들인가? 나 말고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옆 사람한테 물어봤다. “이렇게 무턱대고 기다리는데 화가 안 나요?” “화내면 뭐가 바뀌어요?” 사실 맞다. 내 화가 시뮬레이터를 고치는 건 아니다. 내가 다른 곳에 있다 쳐도 두 시간 동안 세상을 구하겠나. 여기나 저기나 내 두 시간은 그게 그거인 셈이다. 그날 묵주도 샀다. 화가 치고 올라와 이성을 집어삼키려 들면 이걸 돌려서 마음을 가라앉힐 생각이었다. ‘개성질’에 고삐 달려고 한 거다.
성질나면 이제 묵주 던진다. 결국 운전면허 사무실 쫓아가 환불 소동을 벌였다. 이런 사태를 대비했는지 학원 앞에 이런 문구를 붙여놨다. “1분 참으면, 화내고 100분 후회할 일이 없다.” 됐다. 나는 이 운전면허 학원에서 깽판 치고 후회하련다. 그런데 또 환불 소동을 벌이는 손님 역시 나 하나였다. 담당자는 참으로 평온하게 환불은 못 해준단다.
모의 주행 땐 수강생이 더 늘었다. 차는 석 대다. 가다 서다 연습을 하는데 두 시간에 5분 운전대 잡았다. 밖에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의자도 없다. 비까지 추적인다. 해가 졌다. 나는 지는 해에 호통쳤다. “이럴 수는 없는 거야!” 다른 부탄 수강생들이 쳐다봤다. 나를 두려워하는 거 같았다. 한 청년은 자기가 나서 강사에게 나 먼저 가르쳐달라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두 시간씩 매일 기다리다 보니 수강생들이 절친이 된다. 애인하고 어떻게 만났는지, 애들은 잘 크는지, 별별 얘기 다 한다. “화를 내지 않는 방법이 뭐야? 비법이 있으면 알려줘.” 공무원인 한 수강생의 비법은 옆 사람에게 말 걸기다.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 훌쩍 가잖아.” 다른 수강생은 좋았던 추억을 떠올린단다. 이 두 유부녀 수강생은 나에게 “다만 이 비법이 남편한테 화났을 때는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남편에게 나는 화를 다스리는 경지에 오른다면 더 배울 것이 없다”고 했다. 다른 수강생들의 알뜰한 가르침에도 나는 학원을 떠났다. 한국 면허증으로 운전할 수 있으니 수동 기어를 대충 알겠다 싶자마자 그만둬버렸다. 다른 부탄 친구들은 운전면허증의 인질이었다. 석 달 매일 이렇게 운전면허 연습장에서 기다림의 도를 닦아야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거다.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텐진이 여행사에서 주로 하는 일은 항공권 끊기다. 부탄으로 들어오는 항공사는 드루크항공과 부탄항공 딱 두 회사밖에 없다 보니 예약 하나 하려면 한나절은 잡아야 한다. 그 친구 일은 그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 있기다. 그런데 재밌냐고 물어보면 “아주 재밌다”고 한다. “여행사 직원들 다 여자예요. 같이 기다리면 아주 재밌습니다. 이제 다 친구예요.” 반목하는 세계 지도자들을 모두 모아 부탄 운전면허 학원에 같이 등록시키거나 함께 항공권을 끊게 한다면 그 긴 시간 마음을 나눠 세계평화를 이룰지 모르겠다.
기다리다 미칠 지경인 게 운전할 때는 도움이 된다. 부탄엔 신호등이 없다. 그런데 네거리에서 다들 알아서 잘 다닌다. 그냥 웬만하면 기다려준다. 부탄에선 주행이 한국과 반대 방향이다. 한번은 내가 당당하게 역주행을 했는데 나랑 마주보게 된 차들이 경적 한번 울리지 않았다. 가만히 멈춰 서 내가 제정신 들 때까지 기다렸다.
이곳 드루크항공사는 가끔 손님 가방을 제때 나르지 않는다. 그것도 부탄 사람들 것만 뺀다. 한번은 짐이 대규모로 파로 공항에 도착하지 않았다. 나중에 도착한 짐을 집으로 배달도 안 해준다. 파로 공항까지 가서 줄서 자기 짐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불평을 안 한다. 불평을 안 하니까 항공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거다. 직장 다니는 남겔은 일하고 있을 시간인 오후 3시에 공항으로 와 짐 찾아가라는 전화를 받았다. 남겔은 조용히 전화기를 외국인 부인에게 넘겼다. 싸움은 외국인 부인이 잘한다. 남겔의 짐은 집까지 배달됐다.
이 놀라운 참을성이 다 좋은 건 아니다. 약자에게 부당하게 불이익을 줘도 불평하지 않으니 기득권은 만사태평 의기양양일 수 있다. 운전면허 학원에서 만난 한 수강생은 이렇게 말했다. “부탄 사람들은 어떤 사태가 벌어지면 그냥 받아들여. 이게 정신건강엔 좋지. 그런데 만약 너희 나라에서 시뮬레이터 하나가 망가져서 이렇게 손님들이 기다린다면 사람들이 화를 내겠지. 그러면 회사에서 시뮬레이터 하나를 훨씬 빨리 고칠 거야. 그런데 여기선 아무도 고치지 않아. 수강생들은 계속 기다려야 해. 아무도 불평하지 않으니까.”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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