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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04 20:23 수정 : 2016.05.05 14:29

아바나의 명소 말레콘(방파제)에서 올드 아바나로 접어드는 골목길. 낡은 건물과 ‘올드 카’가 서 있는 풍경은 고전영화 세트장 같은 인상을 준다. 노동효 제공

[매거진 esc] 노동효의 중남미 아미스타드
‘이상한 아저씨’ 따라 나선 ‘차차’의 쿠바 여행…도심 빠져나와 ‘잊지 못할 사람들’ 사는 마을로

차차가 이상한 아저씨를 만난 건 아바나의 숙박업소에서였어. 동양인이란 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을린 피부에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지, 바지 기운 자국이 수많은 흉터처럼 보일 정도로. “내 이름은 차차예요. 성이 차씨라 다들 그렇게 불러요. 쿠바엔 어제 왔는데 너무 좋아요. 사진으로만 보던 올드 카, 낡은 건물, 바람에 펄럭이는 빨래, 광장의 노랫소리, 살사 추는 사람들…. 좀전엔 환전을 못해서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돈을 못 내고 망설이는데, 옆에서 보시던 쿠바 할아버지께서 1페소(24페소1달러)를 대신 내주시는 거예요!”

“넌 운이 참 좋은 아이구나!”

그런가요, 라고 대답은 했지만 ‘운이 좋다’는 말의 뉘앙스를 그땐 몰랐어. 다음날 올드 아바나를 산책하고 숙소로 돌아올 즈음에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지. 카피톨리오 근처 골목길을 걷다가 쿠바 가족을 만났어. 아이들이 어찌나 귀엽던지! 보고 있으니 아주머니께서 음료수 한잔 마시고 가라고 하셨어. 집으로 들어가니 아이가 우는데도 계속 시가를 늘어놓으며 사래. 담배를 안 피운다고 하니, 친구에게 선물하라며 자꾸 시가를 사라고 했어. 안 사겠다고 하니 상냥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어.

차차는 답답한 마음에 바다를 보러 말레콘으로 갔어. 쿠바 청년이 다가왔어. “쿠바는 인터넷 사정이 어려워요. 외국인을 통해서만 다른 나라 문물을 접할 수 있답니다.” 청년은 한국에 대해 묻는가 싶더니 모히토를 마시고 싶지 않으냐고 했어. 술을 못 마신다고 하니 모히토 말고 다른 걸 주문해도 된다며, 자꾸 좋은 바를 소개해주겠다고 했어.

도시 거리엔 연출된 볼거리들뿐
문득 ‘이상한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란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한 나라가 전혀 다른 곳으로 변하지”

청년을 피해 카테드랄 광장으로 갔어. 시가를 피우며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는 할머니들이 계셨지. 아, 가이드북에서도 본 분들이로구나! 할머니께서 인자하신 표정으로 차차에게 물었어. “어디서 왔니?” “한국이요!”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여쭸더니 웃으시며 멋진 자세를 취해주셨어. 그리고 찰칵,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는 순간 눈에 들어온 건 손가락 끝을 비비며 “원 쿡!”(약 1달러)을 외치며 노려보는 할머니의 얼굴이었어.

그동안 가이드북이나 잡지에서 본 사진들이 온통 연출이거나, 돈벌이를 위한 모델들이었다니! 복잡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어. 3주 넘게 쿠바 일정을 잡고 왔는데 너무 길게 잡은 게 아닐까? 이제 어떡하지? 숙소로 돌아온 차차는 길을 잃은 느낌이었어. 중남미를 여행하며 늘 조심했지만 쿠바 사람들은 더 경계해야 할 것 같았어. ‘그래, 정 힘들면 예정보다 일찍 쿠바를 뜨자!’ 의자에 앉아 그런 결심을 하는데, 마치 속마음이라도 읽은 듯 어제 본 이상한 아저씨가 말을 건넸어.

“쿠바 여행자 대부분은 외국인용 숙박업소인 카사, 외국인용 버스 비아술을 이용하면서 외국인 관광객, 투어 가이드, 호객꾼, 카사 주인, 레스토랑 종업원들만 만나다가 떠난단다. 그런 길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내일 날 따라오렴.”

어디라도 좋았어, 그런 길과 이런 도시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다음날 아저씨를 따라나섰어. 4시간이 걸려 도착한 곳은 동쪽 끝 ‘피나르델리오’ 주의 캄피스모 ‘비야 아과스 클라라스’였어. 캄피스모는 정부가 운영하는 휴양지라는데, 주말을 즐기러 온 쿠바 사람밖에 없었어. 처음으로 차차는 쿠바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놀 수 있었어. 시가를 팔려는 사람도, 택시를 타라는 사람도, ‘치노!’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없었어. 차차는 평범한 쿠바 사람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춤도 추고, 저녁엔 쿠바 청년이 즉석에서 써준 연애시와 꽃을 받기도 했어.

이틀 뒤 다시 길을 떠났어. 비냘레스 중심가는 아바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레스토랑과 바와 택시와 숙박업소 호객꾼들. 아저씬 차차를 데리고 도심을 빠져나와 비냘레스 국립공원 안의 또 다른 캄피스모로 갔어. 라오스 방비엥처럼 초록빛 용들이 둘러싸고 있는 듯한 산속 한가운데 자리잡은 숙소와 야자수와 수영장. 아침식사를 포함하고도 19쿡이니, 1인당 1만원 정도였어. 그러곤 아바나를 떠나기 전 아저씨가 했던 예언이 실현되었어. “비냘레스 캄피스모에 가면 재밌는 애들을 만날 것 같구나!”

스피커를 크게 틀어놓고 온몸을 흔들어 대며 홈비디오를 찍는 20대 청년들이 있었어. 왠지 부모님 잔소리가 듣기 싫어 바깥으로 싸돌아다니는 불량한 애들 같았어. 근데 아저씨가 다가가 말을 걸었지. 걔들은 자신들이 만든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촬영 중이래. 그렇게 해서 차차는 만났어, 평생 잊지 못할 쿠바 친구들을.

밤이 오면 모든 도시와 마을에 오렌지빛 가로등이 켜지고, 팅커벨이 마술가루를 뿌린 동화 속 거리를 걷는 듯한 착각에 휩싸이게 된다. 노동효 제공

다음날 친구들이 사는 마을로 갔어. 래퍼인 요엔젤의 집에 짐을 풀었지. 그 후 시간은 평생 꿈꾼 적조차 없는 나날이었어. 마치 쿠바판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이었지. 그리고 차차는 배웠어, 처음으로,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진정으로 포옹하고 볼 인사를 하는 법을. 새소리에 잠이 깼고 밤이면 친구들과 마을을 쏘다니며 별을 보았어. 택시보다 마차가 더 많은 마을, 매연 대신 은은하게 코를 자극하는 말똥 냄새까지도 좋았어.

일주일이 지나 차차는 아바나로 돌아왔어. 신입 여행자들이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져댔지. “쿠바에선 갈 만한 곳이 어디죠? 꼭 봐야 되는 건 뭐죠? 체 게바라 말고 또 뭐가 있죠? 어디가 젤 좋아요?” 그런 질문을 받다가 차차는 문득 깨달았어. 저도 모르는 사이 어떤 경계를 넘어버렸다는 것을. 지금껏 자신도 해왔던 질문인데 그 질문이, 주고받는 대화가 시들하고 어색했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난감했어. 문득 아저씨가 했던 말이 떠올랐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란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한 나라나 도시가 전혀 다른 곳으로 변하지.” 아저씨의 말을 떠올리다가 차차는 궁금해졌어. 중남미를 이런 식으로 여행했을 아저씨는 그동안 어떤 사람들을 만났을까?

노동효 여행작가
‘중남미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5월 초부터 <한겨레>에 쓸 생각이란다. 귀국하면 읽어보렴.’

이상한 아저씨는 자신의 이름이 노동효라고 했어.

노동효 여행작가

이번주부터 ‘노동효의 중남미 아미스타드’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여행작가 노동효씨는 혼자 중남미 각국을 장기간 여행하고 있습니다. ‘아미스타드’는 스페인어로 ‘우정’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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