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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11 20:39 수정 : 2016.05.12 10:45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뮤지엄 공간소극장에서 열린 실연 테라피. 이정국 기자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이별은 소중한 경험
이별의 아픔 치유하는 ‘실연 테라피’와 ‘실연 박물관’ 체험하고 둘러보니

지난달 29일 저녁 7시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뮤지엄 공간소극장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방문록에 사인을 한 뒤 자리에 앉은 이들 앞에는 오일 파스텔, 색연필, 물감, 도화지 등 그림을 그리는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8명이 앉을 수 있는 5개의 테이블이 있었지만, 빈자리가 몇개 보였다. 30여명 정도였다. 스마트폰을 만지작대기만 했지 서로를 쳐다보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정적을 깨고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입장했다. 차의과학대학교 소속의 미술치료사들이다. 이별의 아픔을 그림을 통해 치료하는 ‘실연 테라피’가 열리는 날이었다.

실연 테라피에서 이정국 기자가 그린 그림을 미술치료사가 설명하고 있다. 아라리오뮤지엄 제공

그림 그리고 이야기해 보니
웃고 울고 행복하고 화내던 내가 보인다

이제야 알겠다
그 시절도 소중한 삶이었구나
그 사랑이 있어 지금 내가 있구나

덮는 게 능사가 아니다

한 미술치료사가 앞으로 나왔다. “여긴 깨진 인간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자리”라며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미술치료사는 웃으며 “내 이야기를 먼저 하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이별 경험담을 말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던 연인과 헤어지고, 우울증에 시달렸고, 급기야 자살까지 시도했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공개했다. 그러고 나선 “(이별의 상처를) 덮어 놓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놓인 도화지에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기자도 함께 테이블에 앉아 과거의 경험을 되살렸다. 이별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 없듯, 처음엔 막막했는데 무언가 그려나갈 수 있었다. 추억이 담긴 물건과 결혼식 장면 등을 연필로 스케치하고 오일 파스텔과 물감으로 색을 칠했다. 주로 노랑, 초록 등의 밝은색을 칠했는데, 미술치료사는 “현재 긍정적인 상태인 것 같다”고 했다. 예전에 사귀던 애인과의 이별, 새로운 인연의 시작, 결혼까지 그동안의 시간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헤어졌을 당시에는 이별의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하지만 직접 그린 그림을 내려다보니 이별 뒤 이어진 과정이 젊은 날 소중한 추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3자가 내 삶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도 났다.

다른 사람들도 한 시간 이상 그림 그리기에 몰두한 뒤 완성한 그림을 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낯선 이들 앞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경청하고 공감해주었다.

한 여성은 비행기와 손을 그렸다. 제주도에서 직장생활을 했던 남자와의 장거리 연애에 대한 추억이었다. 손은 그와 처음으로 살이 맞닿았던 기억이다. ‘썸’을 타는 동안 우연히 손이 닿았는데 남자는 “손잡아도 돼?”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하는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2년여의 연애 기간 동안 주말마다 제주도로 가는 절절한 연애였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은 끝나버렸다. 배신감으로 인한 증오, 사랑하는 이를 더는 보지 못한다는 상실감이 그를 괴롭혔다. 사랑의 섬이었던 제주도는 이별의 섬으로 바뀌었다. 그는 “이제는 괜찮다. 남자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그림을 그리며 나쁜 기억보다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살아난 듯했다. 어두웠던 얼굴도 조금씩 풀려갔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이른바 삶의 객관화가 된 것이다.

저마다 실연의 기억을 풀어내는 다른 테이블에서도 여기저기 티슈 뽑는 소리가 들렸다. 말하는 이들도, 듣는 이들도 눈물을 훔쳤다. 후회, 분노, 슬픔 등 온갖 감정이 발산됐다. 울음소리와 웃음소리가 범벅이 됐다.

3시간의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온 이들의 얼굴에선 무언가 홀가분한 기분을 읽을 수 있었다. 이별의 경험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듯했다.

‘실연에 관한 박물관’ 전시장. 아라리오뮤지엄 제공

이별은 가장 좋았던 모습을 간직하는 것

‘실연에 관한 박물관’(실연 박물관)이 열리기 하루 전인 4일, 제주 제주시의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Ⅱ 전시장엔 오프로드용으로 개조된 코란도 자동차가 전시됐다. 실연 박물관은 크로아티아에서 실제 연인이었던 설립자가 이별한 뒤 추억을 남기자는 의미로 기획된 전시회다.

제주시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Ⅱ에서 열린 ‘실연에 관한 박물관’ 전시품. 이정국 기자

여기저기 녹슬어 자동차로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이 차는 오프로드 마니아였던 아버지가 세상에 남기고 떠난 물건이다. 가족들은 그 차를 7년 동안이나 버리지 못하고 마당에 두었다. 어머니는 차를 기증하며 “마치 당신인 듯 마당 한켠에서 우직하게 우리를 지켜주던 차. 여기서 더 이상 힘들게 서 있지 마요. 우리를 지켜봤던 시간보다 더 길게 우리가 당신을 찾아갈게요”라고 남겼다. 고인의 유품을 기증한 것은 잊겠다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가족이 기증 의사를 밝힌 뒤 전시실까지 오는 과정은 영상으로도 제작됐다. 지금은 제주도에 있지만 전시가 끝나면 실연 박물관이 처음 열린 크로아티아로 갈 예정이다. 이별의 기억은 이렇게 확장되고 공유된다.

제주시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Ⅱ에서 열린 ‘실연에 관한 박물관’ 전시품. 이정국 기자

꼭 사람과 한 이별만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반려견과의 이별도 남은 이들에겐 슬프지만 아름다운 추억이다. 전시장 한쪽엔 구멍이 뚫린 기저귀가 전시돼 있다. ‘호두’라는 한 반려견의 유품이다.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돼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개를 위해 가족들은 꼬리를 뺄 수 있도록 구멍을 뚫었다. ‘한참’을 더 살 것으로 기대했던 가족들은 기저귀를 상자째로 사놓았는데, 호두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다.

호두는 죽기 이틀 전부터 음식과 물을 끊었다. 대신 집안 구석구석, 가족들의 방을 차례차례 둘러보았다고 한다. 마치 이별을 예고하듯.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풍경을 오롯이 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호두는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

호두와 이별한 가족들은 기저귀를 박물관에 보내며 “호두의 마지막 모습이 측은하기보다는 멋있었다. 십자 모양의 칼집이 난 기저귀를 보며 그 강한 생명력과 단정한 작별을 떠올릴 것이다. 가장 좋았던 모습으로 간직하는 건, 이별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배려다”라는 사연을 남겼다. 이렇듯 이별은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다.

제주/글·사진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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