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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6.29 21:23 수정 : 2016.06.30 18:21

[매거진 esc] 국수주의자 박찬일

포도주로 더위를 쫓는다면 호사다. 큰맘 먹어야 한다. 라벨의 그림이 심상치 않다. 머리 긴 여인이 눈물을 흘린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돈나 푸가타(Donna Fugata). 도망친 여인이라는 뜻. 십칠년 전에 시칠리아에 있을 때, 이 와인은 현지에서도 유명했다. 여러분에게도 익숙한(?) 페페 바로네(ESC의 창간과 함께 연재된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에 나왔던 그 고약한 시칠리안 주방장)도 자신의 식당에서 이 와인을 팔았다. 각설하고, 도망친 여인이 왜 라벨의 주인공이 된 것일까.

우리도 잘 아는 단두대의 여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다. 그녀에게는 친언니가 있었다. 마리아 카롤리나다. 그녀는 이탈리아로 시집왔다. 그러니까, 자매가 각기 프랑스랑 이탈리아 궁정을 말아먹었던 것이다. 카롤리나가 이탈리아 나폴리에 있을 때, 나폴레옹이 진입하고 그녀는 시칠리아로 도망치게 된다. 그러고는 이내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추방된다. 라벨 속의 우는 여인의 속사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와인은 맛있고 쌉쌀하다.

카롤리나가 ‘돈나 푸가타’할 때 나는 ‘쿠오코 푸가토’(도망친 요리사)였다. 사정은 이렇다. 이탈리아의 주방은 파스타 중심으로 돌아간다. 전채 요리가 다섯, 메인 요리가 다섯 개라면 파스타 종류는 열댓 개를 넘는다. 온갖 모양의 파스타가 득실거리고 손님마다 기호도 다르다. 그러니 식당마다 적어도 스무 개 남짓의 메뉴를 갖춘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한 레스토랑에서 파는 파스타. 박미향 기자
문제는, 진짜 문제는 주방에서 받는 주문이다. 우리나라처럼 파스타라면 거의 다 스파게티이고 그것도 미리 삶아두는 경우가 없다. 파스타를 미리 삶아둔다는 건 교도소나 군대 식당이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하루 저녁에 칠십 명의 손님이 제각기 다른 파스타를, 그것도 제각기 비슷한 타이밍에 시킨다. 그래서 이탈리아 주방에는 거대한 파스타 솥이 있다. 파스타 넣는 구멍이 아홉 개나 열두 개쯤으로 나눠져 있다. 파스타 주문이 쏟아지면 보조 요리사는 재빨리 파스타를 선택해서 그 구멍에 집어넣어 삶는다. 척척 익은 것과 더 익힐 것을 구별하고, 또 새로 파스타를 집어넣으면서 삶은 파스타를 건져서 프라이팬에 넣어 버무린다. 신기의 솜씨다. 파스타가 익는 냄새와 색깔(계란파스타의 경우 잘 익으면 색이 옅어진다), 물에 뜨는 모양으로 알아낸다는 것이다. 다 좋다. 나야 뭐 어차피 먼 이국의 견습생, 녀석들의 신기한 기술을 구경하면 됐으니까.

그런데 말이다, 그걸 하던 녀석이 어느 날 도망을 가버린 것이다. 애인과 바람이 났는지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당장 내가 그 일을 하게 됐다. 파스타 담당이 도와주기는 했지만, 바쁠 때는 그도 프라이팬 돌리기에 바쁘니 삶은 파스타 달라고 아우성이다. 가만히 열두 개의 구멍에서 끓고 있는 각기 다른 모양의 파스타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머리가 사차원으로 진입하는 것처럼 텅 비어버렸다. 공황, 패닉이었다. 난리가 난 주방에서 뭐라고 요리사들이 시칠리아 사투리로 떠드는 소리가 웅웅, 귓가에 울렸다. 나도 모르게 주방용 슬리퍼를 신은 채 뒷문으로 나와 버렸다. 녀석들이 욕을 하면서 나를 잡았는지 어쨌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멍해진 정신, 꿈처럼 몽롱한 시간이 흘렀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달까. ‘새끼들아. 파스타나 졸라 실컷 삶아라. 나는 간다.’

집에 와서 요리 재킷을 벗으니 소금 가루가 후드득 떨어진다. 신발도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식당은 난리가 났을 거야, 내가 없어진데다 그 많은 파스타 주문은 어떻게 맞추지? 툭하면 너무 익혀져서 끊어져 버리는 빌어먹을 가느다란 생면은 문제없었을까. 슬슬 겁이 났다. 배 째라 하고 다시 가게에 나가? 이대로 서울로 가야 하는 걸까? 나, 스스로 잘린 거야? 밖에서 누가 불렀다. 식당에서 부르던 내 이름, 이탈리아에서 흔해터진 이름, 한국으로 치면 갑돌이 정도인 이름, ‘로베르토오오오오’를 누군가 목 놓아 부르는 것이었다. 사장이 문밖에서 씩 웃고 있었다. 여보, 나 서울 안 가도 될 것 같아. 저 사람이 웃고 있거든.

박찬일 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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