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6.29 21:31
수정 : 2016.06.29 21:34
[매거진 esc] 홍창욱의 제주살이
<제주, 살아보니 어때?> 지은이
|
서귀포시청 2청사에서 바라본 시내와 태평양 바다. 홍창욱 제공
|
서울에서 제주에 살러 와 처음 마련한 거처는 구제주의 15년 된 낡은 아파트였다. 1월1일에 이사를 했는데 제주도가 그렇게 추운지 몰랐다. 베란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황소바람이었는데, 습하기까지 하여 체감온도는 더 낮았다.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손발이 차가워져 한의원에서 침을 맞게 될 줄이야.
2년 만에 구제주를 탈출하여 10년 된 신제주 아파트로 이사하였다. 상대적으로 새 아파트라 겨울 추위는 덜 느꼈고, 고층이어서 앞이 탁 트이고 하늘이 잘 보였다. 베란다 창으로 사철 내내 화창한 날씨를 기대했는데, 이럴 수가. 날씨가 어찌나 변덕스러운지 아침에 비가 올 듯 우중충하다가 낮에 개고, 오후엔 다시 돌풍이 불다가 밤에는 안개가 끼는 ‘날씨의 백화점’ 같은 곳이었다. 영국에 한 번도 가보지는 못했지만 우중충한 날씨가 마치 영국 같았다. 남편을 따라 제주로 이사 온 아내들이 우울증에 걸린다 하던데, 왠지 이 날씨 때문인 듯했다.
대정으로 출퇴근을 시작하고부터는 제주시 지역의 날씨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대정은 제주도의 서남쪽 지역. 연중 일조량이 좋고 상대적으로 비가 덜 와 농산물이 잘 자란다. 매일 ‘제주시의 영국 날씨’만 경험하다가 안개 낀 평화로를 지나 대정으로 내려가면 빛 내림을 자주 볼 수 있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 날씨가 좋았다. 평화로에서 산방산이 보이는 대정읍 입구로 들어설 때면 제주시의 날씨로 입은 트라우마가 치유되는 듯싶었고, 많은 차량이 그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는 ‘엑소더스’라도 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대정 하면 모슬포, 모슬포 하면 바람이었다. 제주도는 어느 곳을 막론하고 바람이 많이 불지만 특히 대정 지역은 바람 많아서 못 살겠다고 해 ‘모슬포’로 불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겨울엔 북서풍이 바로 대정부터 불어닥치기에 바람의 격이 다르다. 바람 때문에 비가 수평으로 내리며 얼굴을 때려 우산도 필요가 없다. 매년 음력 2월 초하루에 와서 15일께에 떠난다는 바람의 신, 영등할망이 올 때는 사무실 벽에 울림이 어찌나 심한지 대화가 불편할 정도다. 대정에 산 지 3년이 넘은 직장 동료의 아내는 바람 때문에 계속 이 동네에 살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서귀포, 서귀포 하는 걸까. 바람 불지 않고 연중 따뜻한 나라 서귀포. 억척스러운 날씨만 경험한 우리 가족을 위로라도 하듯, 서귀포 신시가지의 신축 아파트로 이사하던 날은 몹시도 온화했다. 거실 창문을 열면 바로 앞에 범섬이 보이고 태평양이 넓은 대정원처럼 펼쳐진 곳이라, 1층이어도 너무 좋았다. 서귀포 구시가지에 사는 지인들은 이곳이 ‘안개가 자주 끼는 지역’이라고 깎아내렸지만 꿋꿋하게 지냈다. 하지만 천국 같은 날씨의 서귀포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 바로 습기다. 제주도 처음 오자마자 ‘제주도 필수품’인 제습기를 장만했는데, 서귀포 오고 나선 그걸론 역부족다. 결국 아내가 제습기 한 대를 더 주문했다. 겨울에도 안방에 곰팡이가 피는데 여름은 오죽할까. 서귀포에서 여름에 집을 비운다는 것은 집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곰팡이 냄새를 맡지 않으려면 여름에도 보일러를 돌려야 하는 곳이 바로 서귀포다. 지역별로 날씨가 이토록 다른데, 다음에 이사갈 곳에선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무엇으로부터 ‘탈출’해야 할까?
홍창욱 작가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