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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18 10:25 수정 : 2016.08.18 10:30

곰팡내 나는 복도와 흰 원피스와 ‘세상의 소리’가 있던 여인숙의 추억

<안네의 일기>를 남긴 여인

영동선 끝자락, 봉화군 석포역 주변에는 옛날식 여인숙이 몇 남아 있다. 유성용 제공

여인숙(旅人宿)은 그 이름만 놓고 보면 말 그대로 여행자의 숙소여서, 여행자 증표만 보여주면 하룻밤쯤은 무료로 재워줄 것도 같다. 하지만 이제 여행자가 여인숙에 가는 일은 흔치 않다. 여인숙은 불편하다. 한 끼의 식사를 때우는 것처럼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 여인숙의 특별한 인상은, 아마도 방과 욕실 사이의 거리일 것이다. 방에서 수건과 비누를 챙겨 슬리퍼를 신고 좁은 복도를 지나 공용 욕실로 간다. 샤워를 마치면 대충 몸을 닦고 아직 잘 마르지 않은 채로 옷들을 서둘러 걸쳐 입고 다시 세면용품을 챙겨 내 방까지 걸어온다. 여름이면 방문을 열어둔 채 웃통을 까고 술병을 기울이는 사내와 눈빛을 나눠야 하고, 겨울이면 코를 간질이는 연탄가스 냄새에 재채기를 한다. 그리고 계절을 가리지 않고 여인숙의 방과 방 사이 얇은 벽들을 타고 이런저런 목소리들이 퍽도 들려온다. 하지만 그녀만큼 이색적인 목소리도 없었다.

“어머! 무슨 <안네의 일기>에 나오는 다락방들 같아요.”

아니 이 무슨 마리 앙투아네트의 빵과 같은 소리인가 싶어 그쪽을 돌아보니, 하얀 원피스를 입은 순진해 뵈는 여자가 남자와 손을 잡고 여인숙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곰팡이 냄새 나는 좁은 복도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목에 수건을 걸고 손에 비눗갑과 칫솔을 든 채 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여자는 쑥스러워하기보다는 신기한 구경거리를 만난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는 남자 몰래 살짝 눈을 찡그려 무슨 신호를 보냈다. 뭐야, 미안하다는 건가? 그녀의 상기된 목소리는 다분히 연극적이어서 어쩌면 궁색한 여인숙으로 그녀를 데려온 가난한 남자를 위한 배려 같기도 했다. 그녀와 그녀의 애인은 공교롭게도 내 옆방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나는 밤새 그녀 애인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남자는 속 깊은 아가씨에게 계속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를 장난감으로 여기는 게 아냐.” 직접 보지 않았으니 속사정이야 모르겠지만 한번 사정해 보고(그 ‘사정’ 아님) 아니면 말지, 녀석 너무 끈질기더군.

그 여인숙은 지하 세면장을 포함한 어설픈 적산가옥을 이리저리 함부로 늘려낸 곳이어서 다락방들의 정수를 보여줬다. 요즘은 사생활 보호를 명분으로 주차장 자동정산기에서 방값을 치르는 무인모텔도 많지만, 아무튼 여인숙은 별별 소리를 다 듣게 되는 곳이다. 그 소리들은 어쩌면 여행자가 듣고 다니는 세상의 이런저런 소리들이기도 하다. 티브이도 없고 두 귀가 열려 잠을 못 이룰 때면, 나는 방구석에서 김수영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곤 했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나는 너무 무거운 ‘죽음 같은 암흑’을 ‘불편의 어둠’으로 바꿔 읊조려본다. 그러면 여인숙의 소음은 고양이의 눈빛 같았다. 여행자는 불편함을 피해가지 않는 이들이다. 어쩌면 나서서 불편함을 감수한다고 할 만하다. ‘나’의 선택과 결정에 따르다 보면 우리는 대개 불편함을 피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고작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고 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은 아무래도 나의 바깥을 향하는 길이다 보니, 얇은 주머니 사정이 아니래도 여행자들에게 여인숙은 참 적당한 숙소 아닌가. 눈부시게 환한 풍경과 풍경 사이 여행자들은 잠시 여인숙에 접어들어 고양이처럼 반짝이는 눈빛으로 깜깜한 밤들을 기꺼이 보냈을 것이다. 안네의 일기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겨울이면 연탄으로 난방을 하는 봉화 석포역 경기여인숙. 유성용 제공
그나저나 이제 여인숙은 몇 남지 않았다. ‘사라지는 것’들을 지금에서 기록하고 박물관적으로 모아둘 수는 있겠지만, ‘사라짐’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다, 아니 나와 떨어져서 이제는 상관없이 흘러가버리는 것이다. 너의 사라짐을 나는 감히 알 수가 없고, 나의 사라짐을 그대가 도저히 짐작할 수 없다. 이 얼마나 슬픈 사연인가. 그럼에도 굳이 끝끝내 기억하겠다는 것은 어쩌면 상대와 상관없는 제 안의 주장 같은 것이어서 아무리 애달파도 한편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맹세들 앞에서는 차라리 덤덤하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예, 그리하시든가요.”

세상 모든 것들은 사라짐의 운명을 가지고 있고 우리들도 사라진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내용이지 싶다. 사라지는 것들 앞에 우리는 다만 예의를 갖추어 나지막이 인사를 건네야 하는지도 모른다. 더 늦기 전에 당신이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면 잠시나마 두 귀가 열린 채로 몸소 사라짐을 겪게 될 거다. 혹 운이 좋아 그대가 사라지지 않은 채로 아침에 깨어난다면, 여인숙을 나오다 말고 잠시 뒤돌아 짧은 인사를 건네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마 당신보다 먼저 그 여인, 아니 그 여인숙이 사라질 테니까.

안녕 안네.

유성용/여행생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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