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8.25 11:34
수정 : 2016.08.25 11:37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카페·서점·미술관 등서 번지는, 소소하지만 행복한 ‘심야 문화’
|
서울 이태원동의 심야책방인 ’고요서사’. 밤을 책과 함께 즐길려는 이들 사이에서 명소가 된 지 오래다. 박미향 기자
|
새로운 밤이 시작된다. 고요하고 아늑한 밤, 책을 읽고 그림과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다. 그러나 익숙한 풍경이 아니다.
늘 밤에 논다. 학교 끝나고, 회사 끝나고 커피를 마시거나 영화를 보거나 음주가무를 즐긴다. 늘 그렇게 논다. “애인 만나면 뭐 해?”라고 물으면 “밥 먹고 영화 봐”라고 대답한다. 대부분 비슷하게 말한다. 왜냐면 할 게 별로 없거든. 과거형이다. 한 대선 후보가 ‘저녁이 있는 삶’을 언급했을 때 피부에 찌릿한 전류가 흐르는 기분을 느낀 사람이 꽤 많았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함부로 집단화해서 미안하지만, 저녁을 발견하고 싶었고, 저녁을 개발하고 싶었다. 급하게 요동치는 낮의 세계를 가까스로 견뎌낸 사람들은 밤의 살결을 더듬으며 위로받고 싶어한다. 밤은 어깨 위의 짐을 가까스로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니까, 그리고 밤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아침은 오늘이 아니다.
어느날 밤이 바뀌었다. 극장에 가지 않고도 영화를 볼 수 있다. 예기치 않은 영화다. 낯익은 배우가 나오지도 않는다. 극장처럼 안락한 의자가 준비돼 있지도 않다. 작은 카페, 흰 벽을 향해 빔 프로젝트의 아리송한 빛들이 직선으로 달려가고, 거기 오래된 영화가 상영된다. 젊은 감독이 친구들과 찍은 단편 영화도 상영된다. 바뀐 밤은 문화에 묘한 이질감을 부여하고 있다. 저녁 아홉시에 미술관에 들어가 그림을 본다. 미술관 옥상에선 뮤지션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그저 시간이 변했다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것들이 새롭게 느껴진다. 어떤 서점은 한 달에 한 번 자정까지 문을 연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오는 사람들이 읽거나 사는 것은 ‘행복’이다.
그래서 자주 ‘심야’라는 단어를 읽거나 듣는다. 심야 음악 감상회, 심야 큐레이터 전시 투어, 심야 책방과 같은 것이다. ‘심야’라는 단어가 붙을 뿐인데 포근하고 은밀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이곳에 가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만의 비밀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밤의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기업이나 단체가 아니다. 작은 카페, 작은 책방, 어떤 개인들이다. 물론 큰 미술관에서도 밤의 이벤트를 기획하고 실행하지만 그조차 시끄럽지 않다. 그냥 조용히 밤에 문을 열어둔다. 홈페이지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간단한 일정을 올린다. 그걸 보고 사람들이 찾아간다. 우르르 몰려가는 게 아니라, 드문드문 하나둘 사람들이 모인다. 밤의 크고 작은 이벤트는 지금도 곳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생겨나고 있다. 의심할 바 없이 문화의 발전이다. 건강하고 온건한 발전.
이우성 시인·<아레나> 피처에디터
kay0177@hanmail.net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