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9.21 19:51
수정 : 2016.09.22 11:49
[매거진 esc] 홍창욱의 제주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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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쇠러 군산으로 가려고 비행기에 오르는 가족들. 홍창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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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그랬듯이 우리 네 가족은 이번 추석에 1000㎞를 이동했다. 제주시에서 비행기를 타고 군산공항으로, 다시 전주 처가에 들러 장인어른 차를 빌려 타고 경남 창원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돌아올 때는 반대로 거슬러 온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에는 4년이 넘게 배편으로 이동을 했다. 서귀포 성산항에서 장흥 노력항으로 배를 타고 이동하며 멀미 때문에 힘든 적도 많았다. 하지만 배에서 내린 뒤부터는, 난생처음 달려보는 한적한 남도길이 귀향길을 즐겁게 하였다. 장흥에서 먹었던 삼합과 벌교에서 먹던 꼬막정식도 기억에 남는다.
서귀포 집에서 나와 창원 고향집에 도착하기까지 대략 8시간 걸리는데 노랫말 그대로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식이다. 두 지역 간의 교류가 얼마나 적은지, 익산~포항 간 고속도로가 한산하여 차가 밀리는 일은 절대 없다. 가는 길에는 마이산도 보고, 지리산 자락의 높고 험준한 산을 지날 땐 마치 외국에 온 것 같다며 탄성을 지른다. 진주 남강 자락의 시골마을은 또 얼마나 평화로운지.
볼거리 많고 먹거리 많은 여정이지만 1000㎞의 이동거리는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추석 연휴가 짧을 때는 양가 가족을 모두 만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명절에만 만나다 보니 자연스레 가족 일에 신경을 덜 쓰게 되는데 혼자 사는 엄마도, 가까이 사는 누나들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특히 이번 추석엔 더했다.
밭에서 도라지를 캐다가 상수도관을 터뜨려서 추석 앞두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엄마 얘길 듣고 누가 해주겠거니 흘려들은 나였다. 내가 목욕을 다녀온 사이 둘째누나는 땅을 파서 파이프를 임시방편으로 묶어 놓았는데 추석날 오후 처가에 온 큰자형이 어렵지 않게 깔끔히 매듭을 지었다. 일의 경중을 떠나 마치 방관자처럼 엄마의 어려움을 대했던 것이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고향집에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곳을 보며 쉬러 온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제주에서 7년 넘게 살며 육지에서의 모든 관계와 단절하거나 자연스레 멀어지면서 아쉬움이 많았다. 특히 가족과의 관계가 그러했다. 그런데 추석 당일을, 아내의 배려로 고향 식구들과 온전히 보낼 수 있었다. 시장에서 떠온 전어회를 배부르게 먹고 보름달을 보며 들판길을 다 함께 걷는 밤마실이 이토록 큰 여유와 행복을 주는지 몰랐다. 해마다 업데이트되는 이웃들의 정보도 내가 이 마을의 구성원이라는 소속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매년 이맘때 따는 대추를 7살 손녀가 대나무로 털면 할머니와 고모가 나무 밑에서 줍고, 3살 손자가 열심히 광주리에 주워 담았다. 다음날은 전주에서 7살 딸아이의 노래 솜씨를 원없이 감상하였다. 노래방에서 남녀노소 가족 각자의 취향이 담긴 노래를 들을 땐 마치 서로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 듯해서 좋았다.
제주 이주 후에 배편으로 처음 육지에 추석 명절을 쇠러 나왔을 때 누렇게 익은 장흥의 들판과 단풍이 든 높은 산이 마치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 제주로 돌아올 때 비행기 안에서 본 섬의 경관, 검은 돌담과 작은 오름이 적응되지 않았고 이곳이 내 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제는 비행기가 제주에 착륙하기 15분 전이라는 방송과 함께 왼편으로 기울면 눈 감고도 바로 아래 한림바다와 마을들을 떠올리게 되고 새로운 소식이 없나 하고 제주의 신문 방송을 더 찾게 된다.
내가 자란 고향의 시간만큼 이곳 제주에서의 시간도 자라난다. 내가 내린 삶의 뿌리만큼 고향의 가족들도 조금은 편안해지지 않을까. 그때는 두 고향의 넉넉함으로 한가위를 보내지 않을까.
홍창욱 <제주, 살아보니 어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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