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여행
전북 정읍 샘고을시장~피향정~무성서원~코스모스밭~구절초 테마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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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산내면 능교리 하천변의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꽃밭. 꽃밭 사잇길로 들어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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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이 있는 마을’이란 뜻의 전북 정읍시는 삼한시대부터 전해오는 땅이름을 그대로 품고 있는 오래된 고을이다. 마한시대 시암골(샘골·정촌)로 불리다, 통일신라시대(757년)부터 정읍(井邑)이 됐다. 현전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 ‘정읍사’의 고장이자,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 작품 ‘상춘곡’의 고장이기도 하다. 오래된 고을인 만큼 낡고 그윽한 정취가 곳곳에 남아, ‘지아비를 기다리는 아낙네의 심정’(정읍사)도 짚어보게 하고, ‘옛사람 풍류’(상춘곡)도 그려보게 해준다. 옛것 살피며 가다보면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환하고 눈부신 가을 꽃밭이 기다리는 완행버스 여행이다. 정읍버스터미널~샘고을시장(구시장)~태인 피향정~칠보 무성서원~산내 코스모스·해바라기밭~옥정호 구절초테마공원~정읍버스터미널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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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태인면 피향정 네거리 버스정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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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고을시장 보고 송시열 사약 받은 장소로
“거참 젊은 사람이 말귀를 못 알아듣네 그랴. 택실 타라니까.” 정읍버스터미널 슈퍼 할아버지 말씀이다. “기본요금밖에 안 나오는 데를, 왜 굳이 버스 타고 내려서 또 걸어서 가냐”는 거다. 하지만 느리게 가기, 마냥 기다리기, 천천히 걷기 따위를 즐기는 완행버스 여행자로서, 택시를 타는 경우는 배차시간 뜸한 버스를 놓쳤을 때뿐이다. 그래도 대화 중에 태인행 241번, 242번, 246번 버스가 구시장 입구를 거치고, 거기서 쌍화차 거리까지 10분 이내라는 걸 알아낸 뒤, 캔커피 하나를 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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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내 ‘전설의 쌍화탕 거리’ 찻집에서 내는 쌍화탕은 돌잔에 담아 불에 데워 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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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분을 기다려 주황색 대한고속 242번 버스에 오르자, 뒤따라 탄 어르신들과 학생들로 좌석은 금세 메워진다. 시장까지 1300원, 태인까지는 1900원, 교통카드도 쓸 수 있다. 정류소 안내방송이 없어 다소 서운하다. 버스는 정읍천을 따라가다 구시장교차로 옆에 도착했다. 이름은 구시장(샘고을시장)이어도 “없는 게 없다”는, 정읍시내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이다. 터미널 앞에 신시장(연지시장)이 있지만, 규모는 구시장이 더 크다. 1920년대에 개설된 곳으로, 동네 이름 시기동도 ‘장터’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
나름 이름났다는 팥칼국숫집·순댓국집 들여다보고, 녹차호떡집 앞을 지나 ‘송우암수명유허비’를 찾아 나섰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제주도로 귀양 갔다 한양으로 가던 중 사약을 받고 숨진 곳에 세운 빗돌이다. 길에서 ‘송시열’을 물으면 고개를 갸웃거려도, ‘양자강’을 물으면 금세 대답이 나온다. 양자강은 최근 방송에 비빔짬뽕 등이 소개되면 유명해진 중식당이다.
진한 쌍화탕 한잔에 금세 온몸이 후끈
빗돌은 이 중식당 앞길 건너 오른쪽, 건물들 틈에 끼어 옹색하게 자리잡은 비각 안에 들어 있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기사환국으로 서인 세력이 몰락한 뒤, 세자 책봉 반대 상소로 제주도에 유배됐었다. 빗돌은 송시열 복권 이후 영조 때(1731년) 세운 것이다. 양자강 앞 식당 갈비박스 주변은 파편화한 옛 고택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돌담과 우물, 고목, 크고 작은 석탑의 석재가 남아 있다. 정읍 최초의 예식장 건물과 퓨전 카페로 쓰이는 옛 여관 건물(영화 <장군의 아들> 촬영지)도 있다.
삼한부터 이름 내려온 ‘샘골’
정읍사·상춘곡 전해내려와
떠먹는 상화탕은 요즘 명물
하연지·코스모스밭도 즐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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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가지 약초를 달인 물에 대추·밤·은행 등을 넣어 내오는 쌍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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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정읍경찰서·장명동주민센터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면 한약 내음이 물씬 풍겨온다. 이른바 ‘전설의 쌍화차 거리’다. 1980년대 초부터 쌍화탕을 내는 찻집이 생기기 시작해, 지금은 10여집이 늘어서 영업중이다. 수십 가지 약재를 12시간 이상 진하게 달인 물에 대추·밤·은행을 띄워 담은 큼직한 돌찻잔을 불에 달군 뒤 뚜껑을 닫아 뜨겁게 내오는 보약 쌍화탕이다. 너무 뜨거워 입을 대고 마실 수는 없고, 찌개처럼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한다. 진한 ‘쌍화탕 찌개’ 한그릇 비우고 나니, 비 맞아 축축해진 몸이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쌍화탕에 구운 가래떡·누룽지를 곁들여 내는 곳이 많다. 어르신들은 물론, 젊은 여성들도 즐겨 찾는다고 한다.
태인 피향정 연못 시든 연잎 깨우는 빗소리 자욱
다시 242번 버스를 타고, 시내를 빠져나와 북면 거쳐 태인면으로 향했다. 들판의 벼논은 황금빛으로 일렁이고 길섶의 코스모스는 삼색으로 살랑거린다. 민가 안팎의 감나무도 주렁주렁 가을빛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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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피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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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만에 도착한 태인은 조선시대 흥했던 옛 고을. ‘호남제일정’ 현판이 걸린 누각 피향정과 연못, 태인동헌과 향교가 옛 모습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볼거리도 많고 여 출신 명사들도 많소. 송대관이 모르요? ‘수학의 정석’ 지은 홍성대도 여 출신이고.” ‘문화재감시초소’에 대기하던 김희선 해설사가 1816년 지은 건물인 태인동헌을 알려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피향정 네거리 주변 길 이름이 ‘수학정석길’이다. “피향정은 1616년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아조 오래된 건물이요.”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이 태산(태인의 옛 지명) 군수로 있을 때, 연지를 거닐며 즐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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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피향정 옆에 모아놓은 선정비·불망비 무리. 맨 오른쪽이 <임꺽정>을 지은 홍명희의 부친 홍범식(태인군수) 선정비, 다음이 관찰사 이서구의 불망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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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향정’은 향기를 입은 정자란 뜻이고, 향기는 예로부터 이름난 이 연못의 연꽃 향기를 말한다. 상연지·하연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하연지만 남아 있다. 연못 안 섬의 작은 정자(함벽루) 자리가 사정터(활터)다. 연못에 가을비 자욱하게 내리자 정자도 젖고 시들어가는 연잎도 흠뻑 젖었다. 빗속에 피향정 위 난간에 앉아 책 읽고 카톡 하는 남녀 모습이 그림 같다.
피향정 옆에 모아놓은 빗돌 무리 중엔 <임꺽정>을 지은 홍명희의 부친 홍범식(태인군수) 선정비, 실학 4대가 중 하나인 이서구(관찰사) 불망비, 그리고 혹정으로 동학농민운동을 유발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친 조규순(태인현감) 불망비도 보인다. 중종 때 태인현감을 지낸 신잠의 선정비(신잠비)는 감시초소 옆에 따로 세워져 있다.
무성서원 거쳐 정극인 묘까지 1㎞ 산길 산책
여기서 칠보로 가려면, 신태인에서 오는 15인승 미니버스를 타야 한다. 손님이 없어 버스를 바꾸고, 횟수도 하루 7회로 줄였다고 한다.
“사림이 이시야 차가 대니지. 노인네들도 다 죽고 인자 차 탈 사람도 몇 읍소.” 피향정 네거리 도로변에서 화초에 물을 주던 팔순 할머니가 말했다. “관광객은 가끔 오데요. 최치원씨가 여기저기 댕기멘 정자 안 지어놨소?”
칠보행 미니버스엔 주말을 맞아 집으로 돌아가는 태인고 기숙사 여학생 2명뿐이다. “아따, 이번엔 많이 탔네잉.” 28년째 버스 운전기사로 일해온 송기대(62)씨가 말했다. “5~6년 전만 해도 큰 버스로 이빠이 태우고 댕겼는디, 인자 요 버스 달랑 한 대뿐이요. 요것도 텅 비어부링게 요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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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보면 무성리, 최치원 등의 위패를 모신 무성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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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보초등학교 앞에서 내려 무성교 건너 잠시 걸으면 최치원 등의 위패를 모신 무성서원이 있다. 들머리 누문과 강학 장소인 강당 건물이 아름답다. 서원 앞에서 물길 오른쪽 길 따라 상류로 오르면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나오고, 여기서 비좁은 아스팔트길 따라 산기슭으로 500~600m 더 가면(삼거리에서 왼쪽길), ‘상춘곡’을 지은 불우헌 정극인의 묘가 있다. 정극인은 세조의 단종 왕위 찬탈 뒤 처가가 있는 이곳에 내려와 살며 후학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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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보면 무성리의 불우헌 정극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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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교리 널찍한 코스모스·해바라기밭 장관
칠보터미널에서 151-2번 버스를 타고 산내로 향한다. 산자락에 걸린, 국내 최초의 유역변경식(낙차를 크게 하려고 다른 하천 쪽으로 물 흐름 방향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방식) 수력발전소로 이름난 칠보수력발전소(섬진강수력발전소)의 거대한 수로관을 바라보며 산길을 넘어 내려가 산내사거리 가까이 이르자, 비에 젖은 오른쪽 차창이 환해졌다.
[%%IMAGE11%%] 능교리 개천가에 가꿔놓은 널찍한 해바라기·코스모스밭 풍경이 펼쳐진다. 능교에서 내려 잠시 꽃밭을 거닐었다. 분홍색 코스모스와 샛노란 해바라기의 대비가 빗속에 더욱 도드라진다. 10월 중순까지는 화사한 꽃밭이 유지될 전망이다.
구절초 축제(10월9일까지)가 열리는 시기에 여행한다면, 능교에서 축제장까지 오가는 왕복버스를 타고 ‘옥정호 구절초 테마공원’까지 갈 수 있다.
[%%IMAGE12%%] 지난 1일, 소나무숲 언덕을 따라 펼쳐지는 이곳 구절초밭은 30% 정도 개화한 상태였다. 이번 주말쯤 만개가 예상된다. 먹거리 장터와 구절초 족욕 등 다양한 체험행사, 공연이 마련돼 있다.
정읍/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정읍 여행정보
대중교통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정읍터미널까지 평일 하루 18회, 주말 24회 고속버스가 운행된다. 일반 1만4600원, 우등 2만1600원, 심야 2만3600원. 동서울터미널에서도 하루 3회 운행된다. 일반 1만6000원. 약 3시간 소요.
정읍터미널 옆 종로종합약국 앞에서 대한고속 주황색 버스 241번, 242번, 246번을 타면 구시장(샘고을시장) 입구 거쳐 태인면으로 간다. 하루 총 18회 운행하지만, 배차시간은 25분~1시간30분 간격으로 들쭉날쭉이다. 태인면 소재지 거리는 2017년 초까지 도로공사를 하고 있어 버스도 터미널로 가지 않고 피향정네거리 부근에서 멈추거나 회차한다. 태인에서 칠보로 가려면 신태인~태인~칠보를 하루 7회 운행하는 미니버스를 탄다. 칠보에서 산내 구절초축제장으로 가려면 칠보터미널에서 정읍에서 오는 151-2번 버스를 타고 산내네거리(능교)에서 내리면 된다. 축제기간 주말인 9~10일엔 정읍역 앞에서 능교까지 40~50분 간격으로 오가는 순환버스(오전 9시~오후 4시)도 운행한다. 능교에서 구절초축제장 주차장까지 오가는 순환버스를 탈 수 있다. 구절초축제장엔 주차장이 5곳, 매표소도 5곳으로, 입구가 매우 복잡하다. 어디로 들어가든 다소 발품을 팔아야 한다.
먹을 곳 구시장 엄마네팥죽의 팥죽·팥칼국수와 대성분식 순댓국, 양자강의 맵고 짠 비빔짬뽕, 갈비박스의 생갈비매운탕, 태인 대일정의 백반과 참게장백반 등. 옥정호반인 산내면엔 민물매운탕집이 여러 곳 있다.
묵을 곳 중앙로 시기동 주변에 에이치(H)호텔(5만원부터)과 모텔이 몇 곳 있고, 터미널과 정읍역 부근에도 모텔이 있다.
여행 문의 정읍시청 관광개발과 (063)539-5231, 교통과 (063)539-5911, 정읍종합관광안내센터 (063)536-6776, 정읍고속버스터미널 (063)535-4241, 정읍 대한고속(시내버스). (063)533-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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